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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지독한 고독

by 난화

아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들이 있다. 더 놀고 싶은데 잠이 쏟아지는 것, 캄캄하고 어두운 방,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배고픈 것, 달콤한 간식을 금지하는 것,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밤... 그러나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심심함'이다.


엄마, 나 심심해!


이 말을 들으면 아, 올 것이 왔구나 한다. '밭 맬래, 애 볼래?' 하면 호미 들고 밭 매러 간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설거지, 청소, 빨래는 그럭저럭 할 수 있는데 애가 놀아달라고 하면 절로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아이의 놀이라는 게 어른은 재미가 없고, 그렇다고 재미없는 티를 내서도 안 되고, 무엇보다 내가 원할 때 놀이를 끝내기가 어렵다. 아이는 똑같은 놀이를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열다섯 번... 절대 질리지 않는다. 그나마 앉아서 다소곳이 놀면 다행인데, 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숨고 찾고 얼음하고 땡 하고 그러다 보면 다리에 힘이 풀릴 수밖에 없다. 애는 놀이 끝나고 또 다른 놀이를 하면 되지만 엄마는 애 밥을 차려야 한다. 어른에게는 놀이도 밥 차리기와 다르지 않은 노동의 연장으로 느껴진다.


올해 학교에 들어가는 우리 집 둘째 아이는 유쾌하고 발랄하다. 이 아이를 보면서 나는 종종 '이 아이는 놀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둘째는 걸음마 이후에 꼭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날쌔게 샤샤샥 움직이며 쉬지 않고 논다. 아무거나 가지고 아무렇게나 논다. 태엽 풀린 로봇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 손끝 발끝에 힘 한 방울 남지 않을 때까지 진심을 다해 논다. 주걱이랑 국자 같은 거 모아서 화장실에서 놀고, 화장실의 내 클렌징폼이랑 치약이랑 샴푸랑 다 섞어서 청소 놀이를 한다. 냄비랑 그릇 다 꺼내서 젓가락으로 두들기고 물도 옮겨 담는다. 냉장고에서 양념도 꺼내어 같이 섞는다. 나한테 걸리면 씩 한 번 웃고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쌀자루를 열어 공중에 쌀을 뿌리며 와아 눈이다 하고 외치기도 하고, 그걸 또 밟고 다니며 스케이트도 탄다. 혼내고 싶은데, 애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멈칫할 때가 많다. 내가 에디슨을 낳은 것인가? 천재를 낳았나?


나는 아이의 놀이에 아주 관대한 편이다. 둘째가 저렇게 온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어도, 위험한 일이 아니면 슬쩍 눈을 감는다. 아이가 심심함을 정복하고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아서 그렇다. 그리고 이 관대함은 어릴 때 지독하게 심심한 날들을 보냈던 내 결핍에서 비롯된다. 어린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은 형벌과 같았다. 집에 어른은 없고, 동생은 혼자 밖으로 쏘다니고, 친구들은 너무 멀리 살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집에는 읽을 만한 책도 없고, 장난감도 없었다. 모나미 볼펜으로 책 여백에 낙서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방학이 너무 싫었다. 학교에 가서 좋은 일만 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무슨 일이 계속 일어나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도 할 수 있으니까 나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엄마는 어린 우리를 외가에 한참씩 맡겨 두었다. 외가는 충청도 태안 구석에 오래된 농가였다. 온통 논밭뿐이고, 언덕 너머에 바닷가에서는 파도가 부대끼는 소리가 넘어왔다. 풀벌레 소리와 갈매기 소리 말고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어른들은 다 일하러 나가고, 나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 동무들이 이곳을 찾아와 우연히 만나는 상상을 펼치고는 했다. 내 머릿속에는 저 너머 바닷가에 놀러 온 내 친구와 내가 함께 헤엄을 치고 고동을 잡는 장면이 진짜처럼 펼쳐졌고, 헛된 공상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서러운 쓸쓸함을 겪어야만 했다. 시골에서 물놀이도 하고 메뚜기도 잡고 풀꽃으로 화관도 만들면 즐거우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린 날의 내 고독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얼마나 서글픈 것이었는지,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심심할 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내내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그때의 가여운 어린 소녀의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위로하려 해도, 그 소녀는 이미 깊이 숨어 버렸다.


엄마,

우리를 두고 길을 나서는 엄마에게

왜 나는 가지 말라고 붙잡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에 있기 싫다고, 혼자 있기 싫다고,

엄마가 보고 싶고 친구가 보고 싶다고,

왜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엄마의 뒷모습 뒤에 덩그러니 남았을까.


감히 놀아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어도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해볼걸.

적막한 빈 방, 그 방에 깃든 어둠,

배고픔보다 두려웠던 외로움에 대해

나는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어.

어린 내 눈에도

엄마의 삶이, 엄마의 걸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걸음을 떼기 전 서로 꼭 안아 주었다면

금방 올 거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면

그 시절의 외로운 소녀는 없었을까

괜히 부질없는 생각을 해 봐.


오늘도 우리 둘째는 짜장밥을 먹다

벌떡 일어나 슈퍼맨 춤을 추고

베란다 문을 열어 밖에 물총을 쏴대고

소파 위를 날아다니다가 잠이 들었어.


그래도 나는 봐줄 거야.

고독한 어린이는 더 이상 없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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