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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라라 Mar 05. 2020

2004.1.2. 모렐리아

Morelia

어젯밤에는 내 방에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역시 혼자 다니는 미국 여자였다. 혼자 다니는 게 반가워서 말을 붙였더니 멕시코를 쭈욱 훑으면서 내려왔단다. 그리고 몇 군데 인상 깊었던 곳을 추천해주었다. 백인인데 얼굴이 빨갛게 탄 것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침대 세 개가 더 차 있었다. 브라질 여자들인데 친구 만나러 가고 있다고 한다. 그네들끼리 뭉쳐 있어서 별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다. 그들도 나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심했다. Morelia로 옮기기로. 멕시코시티 근처에 못 본 게 있으면 다음에 보면 되니까. 어차피 집에 가는 비행기도 멕시코시티에서 타는데. 북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경. Morelia행 버스는 12시 15분이란다. 한 30분쯤에 출발하겠군. 역시나 버스는 20분에 들어오고 35분에 출발했다. 오오~ 1등석 버스라서 그런지 진짜 괜찮았다. 넓고, 발받침도 있고 먹을 것도 주고. 그런데 먹을 게 문제였다. 공짜라고 좋아라 받아 든 후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먹었다. 샌드위치처럼 생긴 빵은 괜찮았다. 속에 햄과 토마토소스가 들어서 개운했다. 맛나게 먹고 그 옆에 있던 쿠키를 한 입 깨물었다. 설탕 덩어리 같았다. 쿠키와 우리나라 약과 중간쯤이랄까.


엄청 단 걸 먹어버렸더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자세를 요리조리 바꿔보고 가슴을 살짝 두드리며 속을 안정시키고 겨우겨우 있는데, 4시간이면 도착한다는 Morelia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결국은 5시간이 훨씬 넘어서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과 centro가 많이 떨어져 있어서 택시를 타고 Hotel Fenix로 갔다. 건물들이 진짜 진짜 예쁘다. 몇 백 년 전 멕시코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것 같기도 하고 예쁜 동화에 나오는 마을 같기도 하다. 내일은 여기저기 둘러봐야겠다. 그런데 큰 일이다. 겨우 시티에서 Morelia로 오는데 5시간이나 걸리고 나는 그것도 힘들었는데 멀리 이동할 땐 어떻게 하나.


그건 그렇고, 또 결심했다. 빨리 과테말라로 내려가서 한 달 동안 스페인어 코스를 들어야겠다. 어찌어찌해서 표도 사고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고 불안해서 못 살겠다. 비행기 타고 바로 날아가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다. 비자만 어떻게 할지 해결된다면.


어제, 그제, 그리고 오늘 느낀 건데 멕시코의 유적들도 좋지만 나는 버스 타고 이동하는 길이 너무 좋았다. 고원지대이지만 높은 산은 보이지 않고 멀찍이 구름들만 보이고, 넓게 펼쳐진 들판에는 갈색 풀들만 무성하고 잿빛 나무와 작은 잎들을 달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 가로수를 대신하고 있는 선인장. 이 모든 것들이 이루고 있는 조화는 멕시코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멀리 구름 아래부터 중턱까지 낮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도 신기했다. 저 작은 마을에도 필요한 것들이 다 있겠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필요한 것'과 다를 것 같다. 좀 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들. 내가 욕심을 버리려 노력해봤자 나는 이미 문명의 이기 속에 살고 있기에 나의 욕심은 여전히 거대한가 보다. 아, 한글 되는 곳에서 인터넷하고 싶다. 내일은 인터넷 카페에서 꼭 한글을 쓰고야 말 테다!!


어쨌든, 멕시코의 길은 아름답다








지금의 감상


눈을 감으면, 그때 버스에서 보았던 '멕시코스러운' 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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