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맞는 말 하기 참 어렵다.
'콜 포비아'라는 말이 있다. 문자나 메신저에만 익숙한 세대가 전화가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직접적인 통화를 두려워할 때 쓰는 말이다. 나는 콜 포비아까지는 아니다. 다만 시나리오 작가였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배달전화를 걸기 전 우리 집 주소와 메뉴를 빨리 입으로 되뇌어 보인다. 몇 번 하는데 자꾸 혀가 꼬인다. 중요한 정보를 빼먹을 것만 같다. 결국 나는 전화를 하기 전 눈에 보이는 종이 아무 데나 통화 시나리오를 적는다.
"안녕하세요."
-네, 무슨 반점입니다.
"여기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인데요."
"짜장면 두 개 짬뽕 하나 탕수육 소짜 하나 배달 부탁드려요."
"단무지 많이 주시고 나무젓가락은 안 주셔도 돼요."
"얼마나 걸려요?"
몇 번 하다 보면 이런 대화체로 다 적지는 않는다.
'인사,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 짜2 짬1 탕소1, 단무지 많이, 젓가락 x, 시간?'
정도 완벽 요약이다. 나의 시나리오대로 대화가 원활히 흘러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당황해 엄마를 호출한다.
시나리오 쓰던 경험이 가득한 나에게 배달어플은 신세계였다. 빠른 시간 내에 나의 목적한 바를 후루룩 내뱉지 않아도 천천히 메뉴를 고를 수 있다. 뭔가 빼먹은 게 없는지 검토도 할 수 있고 요청사항을 따로 기재할 곳도 있다. 배달어플이 수수료를 얼마를 떼가니 하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고, 처음에 낯설던 배달비도 이제 익숙해졌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시나리오작가 노릇을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말하기가 귀찮아 우리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사실은 잘 말을 할 줄 모른다. 말을 잘할 줄 몰라 안 하다 보니, 더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사회생활을 위한 말을 하려 하면 내 말이 적절한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말하기가 귀찮아졌다. 나는 나의 말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뒷북을 치게 되고 자의 반 타의 반 더 말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평소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면 짜장면집에 전화를 할 때도 식당 종업원과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으며 대화 사이를 메꿀 수가 있는데, 딱 생각한 것만 말하는 사람은 그게 쉽지 않다. 배달 전화면 차라리 다행이다. 학창 시절 친구와 주고받는 티키타카가 나는 잘 되지 않아 주로 듣는 사람이었고, 갈수록 맞장구치는 방법만 배웠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를 지금도 잘 들어주는 입 무거운 아이로 기억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할 말들이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뵙는 친척어르신께 "건강히 지내셨어요?" "식사는 하셨고요?" "(자녀) 누구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하는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결혼식을 가서 "결혼 축하해요." 이후로 할 말이 막히는데,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요?"라는 흔히 하는 인사말도 좀 지나 알게 되었다. 배우자의 나이나 직업 등을 묻는 건 실례라고 배웠으니까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는다. 조문을 할 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고정적인 멘트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이 먹은 지금도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격식 있게 답을 해야 하는 것은 'E' 성향의 남편에게 한 번 확인을 거친다. "이 정도로 써서 보내면 괜찮을까?" 그러면 남편이 더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찾아 수정해 준다.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하고, 남편은 나의 글을 예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 같은 글은 남편보다 더 못하다. 누구는 격식 있는 사회적 대화를 처음부터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안 하다 보니 더 못하고 못하니 더 안 하게 되었다는 악순환에 대한 얘기다.
내향인은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채운다. 혼자 멍 때리기도 하고 끝없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 세상 안에서 나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쓴다. 낮에 못 받아친 대꾸를 여러 버전으로 크게 내지르기도 하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에 내가 멋지게 대처하는 상상도 하고,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결코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상상 속의 시나리오다. 그래, 배달 어플이 나와도 나는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