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은 나에게 곧잘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너만 알아야 돼, 하고 모두 다 알게 되는 시시껄렁한 뒷담화가 아니라 대부분은 그 나이 또래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집안일들이었다. 다들 행복하게 웃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다들 힘든 일을 속에 담고 겉으로 표 내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지만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나는 말수도 적고 교실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수많은 여학생 1 중 하나였을 뿐인데 왜 친구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힘듦을 덜으려 했는지 잘 몰랐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들의 급작스런 고백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다였을 뿐이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앞 이야기가 가물해질 때쯤이면 "헉!" "그랬구나" "힘들었겠다"와 같은 어느 타이밍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추임새를 넣어가며 간신히 내 의식을 부여잡았을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반쯤은 공감하고 반쯤은 오늘 급식 뭐 나올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쯤이면, 본인에겐 무거운 문제를 안고 내 앞에 앉아 있던 친구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모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고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라지던 것처럼 가끔 나는 내가 모모가 된 듯 느껴졌다. 다만 모모는 늘 진심이었고 나는 반쯤 가식이었던 것이 달랐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듣다 보면 그 안에 경중이 구분되는데 가끔은 너무 가벼운 문제를 가지고 와 세상 시름 다 짊어진 듯한 친구를 볼 때면 얄미움까지 느꼈다. '네가 하고 있는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외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때면 문득 나의 고민도 누군가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며 '들어주기'가 상담의 여러 기법 중 하나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상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폰을 보며 "응, 응" 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 혹은 마주 앉아 눈을 마주치며 적절한 표정과 맞장구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고 감정을 해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상담자의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기에 상담과 비스끄리무레한 효과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무언가가 조금씩은 해소된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니까. 그리고 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고 듣기만 해주는 친구는 잘 없었을 테니까. 모두가 자신이 말하기를 원했고 듣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 나인 시절의 이야기다.
브런치 작가로 선정된 이후 '브런치 작가'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다. 대부분의 포스팅은 '브런치 작가 되기' '브런치 작가 통과하는 방법' '브런치 작가가 되었어요'와 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내 글을 읽어달라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하여 아주 아주 한참을 스크롤을 내려보았지만 자기가 구독하고 있는 브런치 작가를 추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이러한 좋은 글을 올리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 나만 알고 있기 아까우니 같이 봐요, 하는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내 키워드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그 옛날과 같은 것 같다. 모두 나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조용하게 읽는 자는 브런치를 운영하는 힘을 가진다. 브런치의 존속 이유는 화자가 아니라 독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