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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그 고독하고 쓸쓸한 계절

늦가을의 사유 한 조각

by Rani Ko


11월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자고 일어나면 낙엽이 한 움큼 더 떨어져 있고, 유난히 더 춥다 싶은 날이면 어느새 민둥가지 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바람이 부는 방향조차 달라진 듯하다. 그 바람엔 이전 계절에는 없던 싸늘함이 서려 있다. 마치 세상이 조용히 숨을 고르며 겨울을 준비하는 듯한 공기. 나는 오래도록 11월을 열두 달 중 가장 싫어했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며, 특별히 쉬는 날도 없어 그 날이 그 날 같은 회색빛 달이었다.



학창시절엔 각종 시험, 그중에서도 인생의 큰 과업이었던 수능과 임용고사를 치러야 했기에 하루하루가 송곳처럼 예민했다. 교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회색빛 오후 햇살, 몰아치는 찬바람, 두꺼운 패딩의 지퍼 소리가 그해의 긴장감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국경일 하나 없는 달력 앞에서 주6일 근무(신규 시절엔 실제로 주6일 근무제였다)를 버텨야 했고, 유독 이맘때 들려오는 유명인의 비보 소식들은 마음속에 더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즈음의 11월은 늘 시간이 더디 가고, 날은 짧은데 마음만 길게 늘어지는 계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우중충한 늦가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하나로 결혼식조차 11월에 잡았다. 나만의 이벤트를 만들어 이 회색빛 달에 작은 설렘이라도 심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행복한 일 하나만 있어도 11월을 덜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골랐다. 작은 반짝임이라도 있어야 이 긴 달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속된 시간일 뿐인데, 왜 그렇게 11월이 힘들게 느껴졌을까.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 이 달이 가진 ‘어중간함’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확실함을 선호한다. 특히 나는 그렇다.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향이라 주변에서는 ‘노빠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내게 11월은 참으로 애매한 달이었다.



12월처럼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기다리는 확실한 겨울도 아니고, 10월처럼 단풍이 절정인 전형적인 가을도 아니다. 계절도, 마음도 어느 쪽에도 확실히 닿지 못한 채 밋밋하게 놓여 있는 달. 축제도 적고, 낮은 짧아지고, 기온은 급강하하며 몸과 마음 모두가 움츠러드는 때다.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조차 어딘가 무표정해 보이고, 길모퉁이 카페의 불빛도 여느 달보다 더 희미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더 춥고 일조량이 적은 12월조차 11월보다 나을 때가 있다. 적어도 12월에는 연말의 낭만이 있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낯선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야 겨울이 완성되는 것이 이치라면, 겨울을 준비하는 이 지난한 시간이 없다면 12월의 낭만도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대자연의 논리는 명확했다. 혹독한 추위를 앞두고 나무는 지난 계절의 흔적을 털어내고, 동물들은 월동 준비를 시작하며, 사람들은 김장을 담그고 식량을 비축해 추위를 견딜 힘을 마련한다. 김장 준비로 시장이 북적이고, 텃밭의 마지막 배추가 뽑혀 나오는 풍경도 모두 겨울을 향한 움직임이다. 혹한은 모든 생명에게 시련의 시간이다. 그 시련을 버티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계절이 바로 11월이다.



큰 행사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준비 과정이 즐겁지만은 않은 것처럼, 11월이 어쩐지 낭만 없고 밋밋하게 느껴졌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지루한 준비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비 없이 겨울이라는 고난을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혹독함을 온전히 이겨낼 힘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 떠올랐다. 비평가들은 종종 그 시에 등장하는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선 이’를 늙은 농부의 모습으로 비유한다. 한 해의 노동을 마무리한 농부가 잠시 숲가에 서서 조용하고 허허로운 눈빛을 바라보는 장면. 그는 그 적막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지만, 결국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기 때문이다. 멈춤의 순간조차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11월의 회색빛도 전보다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달이 밋밋하고 쓸쓸한 것은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워내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겨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늦가을의 이 조용하고 탄탄한 준비의 계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조용한 달이, 사실은 가장 묵묵하게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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