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족의 행복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내가 어떤식으로든 협력해서 해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상대가 알아주지 않으면 나에게 자기연민으로 돌아온다. 어떤 책임감은 사람을 키우지 않고 조금씩 갉아먹는다. 끝까지 해낼 힘은 없으면서 내려놓지도 못하는 상태. 그 애매한 책임감이 사람을 가장 오래 소모시킨다.
스스로 원해서 책임지는 게 아니라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버티는 책임이다. 이런 책임감은 성과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죄책감만 남긴다.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자기위안이 동시에 남는다. 그래서 더 괴롭다. 잘해냈다는 만족도 없고 그만뒀다는 해방도 없다.
알량한 책임감은 삶의 방향을 흐린다. 해야 할 일과 버텨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도 계속 남아 있게 하고 이미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한다.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정작 자신은 점점 닳아간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 알량한 책임감을 내려놓으려 한다. 모든 걸 끝까지 해내겠다는 태도 대신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책임지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중간에 멈춰도 되는 선택을 허락한다.
사람을 살리는 책임감은 끝까지 버티는 힘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나의 몫인지 아는 감각에서 나온다. 나를 잃지 않는 선에서만 책임을 지는 것. 그 선을 넘는 순간 책임은 미덕이 아니라 소모가 된다. 이제는 그 소모를 멈추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