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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Oct 26. 2019

보이지 않기에, 더욱 무서운 그것

여러분이 매일 경험하고 있는 무서운 '그것'에 대하여


세상은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 눈에 띄게 강조되는 덕목은 다름아닌 ‘효율성’입니다. 요즘 시대에 ‘효율성’은 어떤 가치보다 앞선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한 인재 교육 회사의 강의를 들으니, ‘적은 시간 일하고도 성과를 높이는 방법’이란 강의가 가장 높은 순위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성과로 발현되지 않는 노력, 생산성과 직결되지 않는 지식은 쓸모없는 가치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 막론하고 ‘어떻게 하면 짧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까’에 몰입하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인문학 특히 문학 전공자로 지내면서, 성과로 발현되지 않는 노력과 생산성과 직결되지 않는 지식이 오히려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주도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는 다시 질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요즘처럼 ‘보여주기’와 ‘성과내기’를 향해 모두가 앞다투어 달려가고 있는 때에 성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력과 생산성 없는 지식이 중요할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잠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사진출처: pixabay.com)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그 아이는 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책보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여 평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20대 후반에는 사랑하는 아버지마저 하늘로 보내게 됩니다. 
별다른 직업도 갖지 못하였고, 특별히 잘하는 일도 없었던 20대와 30대를 보냅니다. 
정치적으로 다수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올곧은 주장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43세에 외딴 섬에 보내져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부유한 집에서 자랐었지만 매일 입는 옷이라고는 흙묻은 바지에 하얀 윗옷뿐이었습니다. 
섬마을 아이들에게 무료로 글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취미는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거나 어부들과 노닥거리는 것이었습니다.
59세에 초라한 풀로 만든 집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어떠신가요? 딱 보기에도 아무 특색도 없는 너무나도 평범한 한 사람의 일대기이지요. 태어나서 외로운 청년기를 보내다가 특별한 업적도 없이 외롭게 한 섬에서 죽음을 맞이한 한 남자의 이야기. 보기에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서 어디에 내어놓기도 참 어정쩡한 인생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죽기 전에 딱 한 권의 책을 남겼는데요, 그 책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남자의 인생은 재조명되기 시작합니다. 그 책의 이름은 <자산어보>이고 그 남자의 이름은 ‘정약전’이었습니다. <자산어보>는 226가지 흑산도 바다 생명의 특징, 생태, 잡는 방법 등을 기록한 조선시대 최고의 해양백과사전입니다. 흑산도에서 생산되는 각종 물고기와 해산물 등에 대한 생태계를 집중 탐구해 이동경로와 습성, 맛, 방언, 약효 등을 한 권에 담은 성과물이지요. 


정약전은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의 형입니다. 정조 때 천주교에 입교한 후 포교활동을 했었는데요, 순조 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약용에 버금가는 실학자였구요, “백성의 현실을 외면한 헛된 학문이 아니라 백성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참된 학문, 그것이 실학이다.”라는 실학 정신을 설파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유배지에서의 고단한 운명을 향해 분노하거나 그렇다고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갔습니다. 양반 신분이었지만 섬의 어부들, 주민들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리고 섬마을 아이들에게 기꺼이 글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아침 바닷가를 거닐며 눈부신 바다를 보던 중 어부의 손아귀를 벗어난 한 마리 물고기가 깊은 바다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연구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정약전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물고기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물고기 이름이 있든 없든 먹고 사는 데 무슨 큰 일일까, 싶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을 누군가가 해 주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평온한 일상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고기들은 각기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만큼의 ‘삶의 가치’도 얻게 되었지요. 


정약전의 호는 ‘손암’이라고 하는데요, 그 뜻은 ‘풀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풀집은 곧 집이 호흡을 하듯 대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 풀집에서 5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아우 다산 정약용과는 헤어져 유배객이 된 지 16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복잡하다고 기죽지 마라.

갈래를 나누고 무리를 지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종합해야 한다.

그 다음은 옥석을 가릴 순서다.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차례짓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변별하며, 먼저와 나중을 자리 매겨라.

그러고 나서 누가 들어도 귀에 쏙 들어오도록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헝클어진 것을 빗질해주어라.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는 것이 공부다.

헝클어진 것을 빗질해 주어라.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는 것이 공부다.

남들은 못봐도 나는 보는 것이 공부다.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를 통해 내 삶이 송두리째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 공부다

정민,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 p78



위의 글을 보면, 우리가 보기에 대단해 보이는 정약용도 실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만들어 가면서 쉴 틈 없이 내적 고민을 했던 흔적이 엿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묵묵히 반복했습니다.  "남들은 못봐도 내가 보는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을요. 그 일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약용의 수많은 저서로 남겨진 것이겠지요.


우리는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가끔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쇼핑을 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나눠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돌연 의식하게 되는 뻥 뚫린 마음의 구멍을요. 그 마음을 '보이지 않지만 의미있는 것들'로 채우고 때론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입니다. 



(사진출처: pixabay.com)


인간은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고, 그 목적의식을 실현하기 위한 삶의 방향성에 대해 늘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보여주기’와 ‘성과내기’를 세상에서는 제아무리 강요한다 하더라도 실은 보이지 않는 ‘나의 잠재력’과 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내적 힘’이 더욱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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