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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Nov 06. 2019

그녀, 슬픔의 식민지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문학평론가 신형철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니말 트리스테(Animal Triste)’다. 독일 작가의 독일 소설이지만 이 단어들은 라틴어다. 나는 라틴어를 모르지만 이 두 단어가 들어있는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알고 있다.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즉,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풋내기 수도사 아드소는 야생적인 소녀와의 첫 경험 이후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을 최초로 실감하면서 저 관용구를 상기한다.” 혹은 더 리듬감을 살려 “Post coitum, animal triste”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짐승의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만의 특수한 진실이라는 듯이,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니카 마론이 이 관용구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중년의 나이에 짧은 기간 동안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눈 이후(post coitum),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사랑만을 추억하며 살다가 육체와 정신의 모든 부분이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버린 여자(animal triste)의 이야기라는 것만 안다.



그녀는 제 나이를 모른다. 아마 백 살쯤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결혼을 했고 남편과 20년을 살았으며 딸 하나를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모를 발작 증세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자문한다. 만일 그날의 발작으로 내가 죽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했을까, 하고.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문학동네, 2010,20쪽) 그로부터 1년 뒤에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그녀가, 여느 때처럼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 모형을 예배를 드리듯 쳐다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그녀는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이 남자는 내 존재의 결락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그녀의 삶에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21-23쪽)


그날 이후로 두 남녀는, 각자의 가족이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24쪽)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자신의 경우는 후자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남자, 프란츠(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프란츠라고 부를 뿐이다)를 만나면서 그녀의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어느 날 가족에게도 되돌아가고,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멈췄다. 이제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또 실천했다. 그녀의 삶은 이제 다음과 같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그가 남기고 간 안경을 몇 년 동안 끼고 살아서 자신의 눈을 망가뜨리기.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11쪽) 혹은 마지막으로 함께 누운 침대 시트를 빨지 않고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꺼내어 펼쳐서 보기.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내 연인의 정액 흔적”을 다시 보기 위해서.(13쪽)

이상의 내용은 이 소설의 첫 챕터에 적혀 있는 것들만을 정리한 것이다. 1년 전 일이니 분명히 기억난다. 고작 20쪽 남짓인 이 첫 챕터를 나는 몇 번에 걸쳐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쪽을 다 읽고 나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늘 찾아온 그런 종류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서 내가 늘 찾아온 그런 종류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서 썼지만,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모니카 마론은 주인공 그녀의 형상 속에 2차대전 이후 동독에서의 삶이 한 여자에게 미친 불행한 영향들을 섬세하게 새겨 넣었고,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격변이 개인의 삶에 가져온 엇갈림과 비틀림을 그녀 주위의 다른 인물들을 통해 포착해내면서, 이 소설이 그리는 사랑의 사건을 역사의 사건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역사라는 변수에 종속돼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설이 한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얼마나 더 깊어지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탄식이 나오도록 입증한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사랑과 참혹한 애도의 서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섬세한 스케치인 이 소설을 모니카 마론은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끌고 나간다. 최상의 산문 문장은 고통도 적확하게 묘파되면 달콤해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장이다. 달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꿈과 잠의 주체인 우리는 안다. 꿈과 잠에 비유해본다면, 그녀의 문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고,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그렇게 꿈꾸듯 잠자듯 이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듯한 결말을 마나게 되고,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작가는 어째서 ‘post coitum’을 지우고 ‘animal triste’만 남겨 놓았나. 우리가 특정한 순간에만 슬픈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체로 슬프기 때문이 아닌가. 이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저항하는 일이, 요즘의 내게는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단상: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버린 여자. 개인의 사랑을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시킨 소설. 지독한 사랑과 참혹한 애도의 서사.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섬세한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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