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Nov 06. 2019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살아남은 자의 아픔> 프리모 레비

여성학평화학연구자 정희진 

  

프리모 레비. 한참 동안 커서만 깜박이고 있다. 기운이 없어서 그냥 잤다. 삶과 언어가 마주할 때 부등호는 언제나 삶을 향한다. 언어의 한계, 나의 한계, 하고 싶은 말은 참았덤 숨처럼 가쁜데, 생각이 짧으니 검열과 긴장이 보초를 선다. 그 유명한 ‘생각하지 않는 죄’에다 ‘생각이 얇은 죄’까지 겹쳐 다른 책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와 닿고 싶은 욕망이 주제 파악을 이기고 만다.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 이런 사람은 홀로코스트가 아니었어도 매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레비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오시비엥침에서 1년 10개월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유대인 죽이기는 ‘더러운 일이어서’ 나치는 자기 땅에서 자기 손을 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동유럽 소수 민족에게 시켰다. 아우슈비츠는 오시비에임의 독일어 이름이다. 프리모 레비는 화학 박사였지만 인종차별법 때문에 일자리가 없었다. 이후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생환 후 수많은 시와 소설, 회고록을 남겨 살아남은 자로서 ‘임무’를 다했다.

나치즘은 우리에게 ‘이것이 인간인가’(레비의 책 제목)를 질문하지만, 희망을 앞세운 이들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고문이었을 그의 인생은 그런 경험을 한 인간이 망가지지 않고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인간 승리’를 증거(해야)하는 삶이었다.

(pixabay.com)


“내가 놓친 수레바퀴가 절벽 끝으로/ 천천히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과연 언제까지/ 이 육신을 나에게 복종시켜야 할까?”(<수레바퀴>) 만일, 만일에 그는 일찍 쉬고(죽고) 싶었으나 어떤 시선과 의무감 때문에 68세까지 ‘살아야’ 했다면, 나는 그를 찬양하는 일들을 나치만큼 증오할 것이다.

그는 투신 자살했다. 지금 우리 사회 ‘보통 사람’의 자살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난 무려 100년 참고 참는다....../ 난 내일의 죽음과의 약속을 지킬 거다!/ 하지만 너네 인간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용설란>) 


기차와 시계는 초기 자본주의의 엔진이었다. 대량 생산, 운송 수단, 정확한 시간표는 필수적이다. 끝없는 기찻길은 미래의 표상이다. 혁명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한 기차였다. 하지만 혁명은 유래없는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한 폭주 기관차였다. 근대는, 지향은 달랐지만 소련에서 2천만 명,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2천만 명, 유대인 학살 6백만 명의 사망자를 생산한 죽음의 시간성이었다.

뇌는 신체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병이다. 자살은 뇌 기능의 오작동으로 인한 인지 오류, 불행한 미래를 확신하는 비합리적 신념 때문에 이뤄진다.

(pixabay.com)


망각을 거부한 투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남은 인생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이다. 불확실한 삶이라면 가능성을 희망이라 믿고 살겠지만, 확실한 상태에서 선택은 많지 않다. 

확실성의 볼모가 된다는 것. <기차는 슬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행복할 때, 정지했으면 하는 그 시간이 실현되었다. 우리는 기차역에 함께 앉아 있었다.

목적이 분명한 기차가 정시에 출발한다는 확실성. 기차역(삶)에 끌려온 사람들은 살아 있는 죽음을 산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시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 만큼 기차가 오기 전에 죽은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될까. “모든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억의 조각품이다.”(<내 벗들에게>) 이 사랑스러운 목소리처럼.   

이 시집은 이산하 시인의 프리모 레비다. “세상이 끝나는 방식은 쾅 하는 소리가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이다.”(T.S, 엘리엇을 레비가 인용한 것을 이산하가 옮김) 레비의 메모들. 이산하의 각주와 해설도 시다.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 슬픔의 식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