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는 없는 그 말, 엄마
<말모이 100년, 내가 사랑한 우리말> ,by 소설가 김주영
‘훈민정음’에는 없다. 어른들이 쓰기에는 민망하거나 품위 있는 언어는 아닐지 모르지만 고결한 언어다. 엄마는 젖먹이나 철부지들의 전용어다. 그런데도 여든 늙은이가 입에 올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마력을 지닌 말씀이다. 지금은 멀리 사라져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젖냄새가 이 말씀에는 배어 있다.
풍차 바지 입은 젖먹이가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다. 인중에 묻은 코딱지와 항문에 낀 똥 찌끼를 맨손으로 닦아주는 막무가내가 이 말씀에는 있다. 지도에도 찾아볼 수 없는 보릿고개를 넘길 때 벨을 부리며 보채는 살붙이를 달래며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쓸쓸히 웃는 모습이 이 고결한 언어에는 배어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보조개같은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질러 지청구를 받고 돌아와도 일언반구 꾸짖지 않는 사람이 엄마다. 까투리처럼 말을 듣지 않고 배식배식 복장을 지르는 아들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객지를 말똥처럼 구르다가 알거지로 돌아온 아들을 홍시같은 젖가슴으로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은 엄마뿐이다. 우듬지 위에 떨어져 반짝이는 6월의 햇살 같은 언어 그것이 엄마다. 사랑의 실패로 수척한 얼굴로 돌아온 피붙이를 끌어안고 같이 서럽게 울어주는 사람, 하느님보다 먼저 울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엄마다.
엄마는 나로 하여금 도떼기시장 같은 세상을 방황하게 하였으며, 파렴치로 살게 하였으며 쉴 새 없이 닥치는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엄마가 나에게 준 크나큰 선물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엄마가 열명길에 들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희생당했으면서 덤덤하게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다. 그래서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은 “엄마”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상한 수사들은 속임수와 허울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였다.
숨 거두기 전 엄마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무덤 만들지 마라. 늬들(너희) 고생한다. 그래서 엄마는 무덤도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어디에도 있다. 엄마가 남긴 마지막 전략이었다.
(2019.11.2.「김주영이 사랑한 우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