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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Apr 18. 2024

그러는 ‘척’ 하다가 진짜가 되어버린다네

40년 전통찻집 주인장의 이야기


인사동 전통찻집, <초당다실>


지난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영하 14도, 15도의 강추위가 이어졌던 날이었다. 외투와 목도리를 꽁꽁 여미고, 점심시간에는 늘 하던 산책도 나가지 않은 채 사무실에 콕 박혀 일만 하고 있었다. 금요일은 유독 일에 더 집중을 할 수가 없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거지. 빨리 퇴근하고 싶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지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으셨던 건지, 함께 일을 하던 실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란희씨, 지금 바쁜 일 없죠? 괜찮으면 차나 마시러 갑시다. 같이 가고 싶은 좋은 곳이 있어요.”


오호. 차 마시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가겠구나. 신이 나서 실장님과 함께 나섰다.


그곳은 어디일까. 어떤 차를 파는 곳일까? 커피를 파는 곳일까? 기대를 하며 익숙했던 골목을 지나 한 건물에 들어갔다. 종종 가던 식당이 있는 골목이었는데 그 건물에는 한 번도 눈길을 줬던 적이 없었다. 1층 모퉁이 구석에 쪽문이 있었다. 실장님은 그 문을 열었다. 마치 비밀의 공간처럼, 아주 작고 아담한 전통찻집이 드러났다. 아니, 이런 곳에 찻집이 있다고? 손님 테이블은 딱 2개. 우리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주인장은 이미 차를 준비하고 계셨다. 옛날 무쇠 난로 위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주전자에서 정감이 묻어났다. 얼마나 오래된 찻집일까. 벽지며 장식장, 소품들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오히려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흔적이었다.


“어서 와요. 너무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죠? 코로나 이후로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됐네요.”


주인장과 실장님은 아주 오랜 사이라고 한다. 이 찻집은 40년 전에 인사동에서 자리를 잡은 뒤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주인장과 실장님도 30년이 넘는 인연이란다. 근황을 나누는 두 분의 대화를 들으며 찻집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대추를 달콤하게 쪄낸 다식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차가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홍삼과 녹차를 블렌딩한 홍삼말차, 연잎과 메밀로 만든 백련잎차, 당귀+작약+숙지황+백작약+대추를 함께 넣고 끓인 쌍화탕, 색깔이 아주 맑았던 구절초차, 잣이 듬뿍 들어간 오미자차와 마지막엔 메리골드차까지 한 잔씩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는 정성에 감동이었다. 후에 검색을 해본 것이지만, 이 찻집은 ‘차의 오마카세’라고 불릴 정도로 차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인사동 전통찻집, <초당다실>


주인장이 인사동에 찻집을 연지는 40년이 넘었지만, 차를 접하고 차와 관련된 일을 하신 건 50년이 훨씬 더 되었다고 한다. 손님 테이블이 고작 2개뿐인 이곳에서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대충 어림잡아보기에는 월세도 못 낼 것 같은데. 일흔을 훌쩍 넘은 연세에도 여전히 고운 모습, 차를 대접하고 소개하는 자태에서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찻집을 하고 계신다는 게 너무 멋지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건 실장님도 마찬가지죠. 실장님도 늘 그곳에서 그렇게, 오롯하게 지내고 계시잖아요. 실장님이야 말로 정말 보살님이죠, 보살님.”


“저는 그냥 그러는 척, 시늉만 하는 겁니다.”


“그렇게 ‘척’하는 게 정진精進이죠. 정진이 뭐 따로 있나요. ‘척’하다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실장님과 주인장 사이에서 오고 가는 덕담에 내 마음도 훈훈해졌다. 아주 추웠던 겨울 초입에서 몸과 마음도 따뜻하게 녹여주었던 그 공간, 그들의 대화는 봄이 한 발짝 가까워진 지금까지도 마음을 따뜻이 데워주고 있다.


롤모델,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씩 접할 때가 있다. 어떤 한 대상을 콕 집어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닮고 싶다고 여겨지는 분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30년, 40년, 혹은 평생의 걸쳐서 한 가지만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사람들을 ‘전문가’,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또 다른 맥락에서는 그 분야에서의 ‘수행자’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들에게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전문성은 물론이거니와 진정성과 진실함이 느껴진다. 아주 사소한 손짓,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일지라도 그들이 할 경우에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전해진다.


그들이 무수히도 겪었을 고난들, 부딪히고 쓰러지고 깨졌던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한 의심, 그러면서도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반짝임이 수천 번, 수만 번 오고 갔을 테지. 평생을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성취의 순간, 고단함의 순간이 있더라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다는 척, 그렇게 묵묵히 하는 게 바로 꾸준함이자 정진이며, 마침내는 ‘진짜’가 되어있을 거라고. 40년 전통찻집의 사장님을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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