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맘과 캣대디

대충 고른 남편

by 라니

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남편 회사 근처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딸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아빠랑 만날 때 열심히 고르지 않았어. 때가 맞아서 결혼했는데, 다행히 아빠가 좋은 사람이네. “ 04년도에 만났으니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오해와 갈등으로 냉랭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어느 부부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작은 (나만의) 권태기를 지나 안정기를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같이 늙어갈 것이라고.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 나는 호르몬의 지배를 제대로 받았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분홍빛으로 변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남편과 처음 만난 해에 3년 차 교사였던 나는 중2 담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반은 짓궂은 반으로 유명했었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상태의 학생들이 많았다. 서툴고 어설픈 담임교사였던 나는 연애감정으로 인해 신기한 경험을 했으니, 때는 지필평가 기간이었다. 시험 감독을 하던 중, 신기하게도 교실에 있는 학생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여서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쳐다봤고 내 감정에 취했다. 그 시기의 따뜻한 감정, 한낯의 햇살이 노랗게 비치던 교실 공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사랑을 했더니 내 주변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결혼 적령기에 있었던 우리는 순탄하게 결혼에 이르렀다. 하지만 빠릿빠릿한 나와 달리 비교적 여유로웠던 남편의 성격에 답답해하며 홀로 작은 권태기를 몇 번 겪었다. 자잘한 나만의 파도를 넘나들며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둘째 아이의 사춘기 시기였다. 아이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고, 상담사로부터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담사는 내 탓을 했고, 이때 남편은 내편을 들어주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문제가 있으면 서로를 탓하느라 바쁘고 관계가 멀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았고 아이 얘기를 많이 나누며 신뢰를 쌓았다. 이때 마음속으로 ‘졸혼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살 수 있겠네 ‘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님은 남편에게 “니 처한테 잘해라”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남편은 그 말을 잘 따랐다.


남편은 그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고 위해준다.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종종 선물을 사서 서프라이즈라고 하며 건네준다. 내게 사준 물건들이 단지 남편이 쇼핑을 좋아해서가 아님을, 나를 아끼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남편은 사랑을 잘 표현할 줄 안다.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포옹도 수시로 한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딸 친구가, 남편이 퇴근 후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뽀뽀하는 장면을 보고 크게 놀랐다는 얘기를, 그 친구 엄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때 남편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점을 객관화했다.


작년부터 남편과 공통의 취미생활이 생겼으니, 바로 길고양이 밥 주기이다. 청계산 등산 후 내려오는 길목에서 만난 길고양이(살랑이)와 우리는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나와 남편은, 쉬는 날마다 살랑이를 만나기 위해 청계산을 오르내렸고 그 길에서 만난 다른 길고양이에게도 간식을 나눠줬다. 요즘은 관악산 교동길에 자주 가고 있다. 엄마 고양이(하악이), 아기고양이 4명이 7월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이 걱정되고 보고 싶은 마음에 더위를 이겨내고 즐겁게 산책을 나선다. 부부 사이가 좋으려면 같이 운동을 하면 좋다고 하는데, 나와 남편은 길고양이를 챙겨주며 더 돈독해지고 있다.


다정한 남편에 비하면, 나는 무뚝뚝한 편이다. 표현을 잘 안 하고 남편보다는 애들이 우선이다. 자녀를 보살피고 챙겨주는 나의 행동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지만, 때때로 서운해지고 상처받는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은 반항적인 아들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지만 아들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다. 어리석은 나는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다. 그러나 행복을 애들로부터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자 편안함을 주는 존재, 해줄 수 있는 것을 주면 그걸로 충분하며 그 후는 자녀의 몫이다. 행복은 나에게서, 남편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 밤에도 남편과 같이 하악이네 가족들을 만나러 교동길에 가야지, 다녀와서는 하이볼을 마시며 행복을 누려야지.

사진1_하악이네 가족들

사진 2_한 편의 영화 같은 만남과 헤어짐을 한 살랑이

고양이는 나에게 고통과 번뇌는 zero, 커다란 행복만을 주는 놀라운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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