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도구
‘성장캐(성장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면접 준비를 할 때였다. 첫 연습 시간에 말을 못 했도 너무 못 했고 지나치게 더듬었으며 낯부끄러워했다. 매일매일 연습을 했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이때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와 ‘성장’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 경험을 했다. 과거의 나보다 지금 나는 내적으로 건강한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읽기와 듣기이다.
대학원 시절부터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바쁜 일과에서 신문 읽기는 빠뜨리지 않는 루틴이다. 큰 기사 위주로 읽다가 눈길이 가는 기사에 멈춰서 읽는 낮은 수준의 신문 읽기이긴 하다. 꾸준한 신문 읽기는 내 시야를 넓혀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태도를 갖게 해 주었다. 좋아하는 필자 리스트를 구축해 갔고 내가 읽은 좋은 칼럼을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같이 읽으며 생각을 나누었다. 특히 김범준 교수의 <옆집 물리학>은 읽다가 가끔 감탄하게 된다. 과학을 주제로 감성적이며 사회적인 글을 쓰는 김범준 교수님은 가장 좋아하는 칼럼니스트이다.
책은 20대에도 많이 읽었으나 그때의 독서는 솔직히 허세였다. 지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서, 남보다 잘 나 보이고 싶어서 겉멋으로 책을 읽었다. 지금의 독서 패턴은 30대 중반에 만들어졌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내 뿌리가 얼마나 약한지 알았고 심적으로 많이 흔들렸다. 나조차 몰랐던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자, 정신과의사가 쓴 서적을 읽어가며 나를 조금씩 알아갔고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결국 인간은 다들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하며 위로를 받았다.
듣기의 세계로 나를 초대한 것은 친구 J였다. 우린 아이를 키우며 서로가 연약한 시기에 처해 있었고 이때 <벙커 1 특강>을 소개해줬다. 고혜경의 꿈 이이기, 정신과의사 김현철 특강, 강신주 박사의 철학 이야기들은 너무 재미있었고 특히 꿈 이야기는 녹음해 뒀다가 출퇴근길에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었다. 나도 모르던 내 무의식을 알아갔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도 가끔 꿈일기를 쓰고 있다. <벙커 1 특강>에서 시작된 팟캐스트는 도서팟캐스트로 이어졌다. <책 이게 뭐라고>, <책읽아웃>은 나의 최애 방송이었다. 두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첫 장면은 휴직중일 때다. 집안일을 다 마치고, 애들은 거실에서 놀고 있고, 안방에 누워서 <책 이게 뭐라고>를 듣고 있었다. 이서희 작가가 <이혼일기>를 이야기하는 에피소드가 재생 중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듣기만 하고 있는데도 매우 충만했었다. 다음 장면은 어느 밤, 불을 끄고 누워서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 에피소드를 듣고 있었다. 모르던 세계를 알아가는 기쁨이 너무 큰 나머지 엔도르핀이 뿜뿜 나왔었고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도서 팟캐스트를 들으며, 듣기는 읽기의 세계도 확장시켜 주었다. 작가들을 알아가며 그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작가가 추천한 책을 읽으며 나는 빠르게 다독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읽은 소설, 에세이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동화책에서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내가 읽은 책 속에서 많은 인물들은 평범했고, 나와 닮아 있었고, 저마다 힘든 상황에 처해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몇 년 전, 한 학생이 던진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때가 생각난다. 때마침 읽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한 구절에 나는 단번에 치유를 받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못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 생각이 맞아.’라는 문장이었다. 어느 시기에 나와 공명하는 문장을 만나면 스스로 치유된다.
요즘은 <작은 서점>, <리딩 케미스트리>, <라디오 북클럽>,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들으며 출퇴근하고 있다. 너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은 날에는 운전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한 느낌이 든다. <작은 서점>에서 만담꾼처럼 책을 너무도 재미있게 소개하는 최민석 작가가 좋아서 그가 쓴 <마드리드 일기>를 읽고 있다. 다음달부터 더 멀리 출퇴근 해야하는데, 지금 가진 리스트가 부족하다. 이번 기회에 밀리의 서재를 구독할까. 앱은 설치했고, 결재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