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 라니

할머니가 되어서도 달리고 싶어

by 라니

하루 종일 빈둥빈둥 거리며 생산성이라고는 1도 없이 보냈다. 뭔가를 하지 않아도 하루는 잘 간다. 밤에 4킬로를 달렸고, 하루를 그럴듯하게 마무리지었다.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은 하루를 근사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6년 차 러너이다.


20년 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전부터도 달리기에 담금질을 해왔었다. 내킬 때면 매일 동네 광장을 열심히 뛰다가, 시들해져서 안 뛰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다. 달리기에 대한 로망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심어주었다. 요조 작가가 ’아무튼 떡볶이‘ 를 출간하며 출연한 ’겨울서점’ 영상이 나를 정규직 러너로 이끌어 주었다. 영상에서 요조작가가 ‘런데이‘라는 어플을 소개했고 나는 그 어플을 설치하고 1분 달리기부터 시작했다. 옆에서 달리기 코치가 하나하나 소개해주는 듯한 기분이었고 8주 플랜을 12주 만에 완성하며 30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다.


고비는 있었다. 5분 달리기 후 진도가 영 안 나가서 같은 코스를 4주 가까이 반복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J가 나의 진도를 앞서 가는 것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친구와 선의의 경쟁 덕분에 나는 달리기에 안착했다. J는 어플을 통해 박수소리를 보내주고, 내가 올리는 달리기 피드에 공감을 눌러주며 응원해 줬다.


달리기 2년 차에는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양재천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면 5킬로는 금방이었고 주 3회씩 뛰었다. 나의 마음은 더 달리고 싶었으나 나의 몸은 허락하지 않았다. 22년에는 아킬레스건이 안 좋아서 1달 넘게 쉬었고, 23년에는 건초염에 와서 달리기를 잠시 멈췄었다. 몸과 마음이 타협해서 정한 루틴은 4킬로씩 주 2회 달리기이다.


달리기를 하며 달라진 점이 있다. 몸무게에 변화는 없지만 군살은 대부분 정리가 되었다. 폐활량을 비롯하여 체력이 좋아졌고, 또래 동료들과 비교할 때 근무 시간에 나른해하거나 조는 일이 없다. 달리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이, 스스로도 대견하다. 달리기 기록을 첫 수업에서 내 소개를 하며 꼭 얘기한다. 낮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복잡한 생각들도 달리기를 하는 동안 차곡차곡 정리되어 마음의 서랍속에 들어간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는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은 하루를 근사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 낮에도 달려봤지만 나는 밤 달리기가 좋다. 어둑어둑해서 나를 덜 드러낼 수 있고, 낮 동안 별로인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밤 달리기를 통해 하루를 괜찮게 보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맥주를 빼놓을 수가 없지. 달리기를 하기 전까지, 나는 술과는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이었다. 술주정뱅이었던 아빠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의도적으로 술을 멀리했던 나를, 달리기가 바꿨다. 달리기를 하며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내 몸에 맥주가 들어가는 순간의 청량함이란! 맥주가 그렇게나 맛있는 액체인지 모르고 살았다. 달리기 6년 차인 지금도 러닝화를 신기까지가 제일 힘들지만, 나를 계속해서 달리게 하는 원동력은 달리기 한 후에 마시는 맥주이다. 그러고 보니 달리기 연수와 맥주 연수가 일치하겠구나. 6년간 달리기를 한 후 이러저러한 맥주를 마시면서 내 취향의 맥주도 발견했다.


아들이 고학년이었을 때,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나는 달리기를 했는데 그 장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따뜻하게 남아있다. 요즘은 딸과 달리기도 한다. 언젠가 달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달리기 텀을 늘리고 거리를 줄여야겠지. 무릎과 관절을 아껴서,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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