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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들, 사라진 밤의 기록.

저작권은 지켜짐의 언어

by 라온



사람들은 좋은 글을 보면 저장한다.

‘너무 공감돼’, ‘이 문장은 내 마음 같아’, ‘어디서 본 건진 모르겠는데 좋더라.’


글이 좋다며 공유 버튼을 누르면서, 정작 그 글을 쓴 창작자의 밤이 얼마나 조용히 지워졌는지를 묻는 이는 드물다. 글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그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를 의심했으리라.


“이 문장을 누가 읽어줄까.”


“이 말을 할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수백 번 퇴고하며 자신을 깎아내던 시간.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며 겨우 남긴 한 줄. 그건 단지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낸 시간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그 문장이, 아무도 모르는 이름 아래에 놓였을 때.


“좋은 글은 나눠야지.”

“누가 썼는지가 중요한가요?”

이런 말들이 던져질 때, 글의 주인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글을 썼던 사람은 없고, 글자만 남아 떠돌아다닌다. 저작권은 법의 언어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저작권은 지켜짐의 언어여야 한다. 내가 존재했음을, 내가 이 글을 위해 견뎌 내었음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이름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힌다.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렸다면, 그 울림의 시작은 분명한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지우고 박수를 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고통 위에 올라서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진짜' 창작자들을 잃어왔다. 그들은 표절당하고, 도용당하고, “어차피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하잖아.”라는 말 앞에서 침묵했다.


말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창작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명씩, 귀한 목소리들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다. 침묵 속에서 사라진 밤들을, 그 밤들이 낳았던 문장들을. SNS는 속도를 추구하고, 플랫폼은 확산을 독려한다. 또한 속도는 출처를 지우며, 확산은 책임을 흐린다. 그러니 이제는 물어야 한다.


“이 글은 누구의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우리 시대의 글을 바꾸고, 우리 시대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다. 이 질문을 외면하는 사회라면, 아무도 글을 쓰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심장을 태워 만든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가도 된다고 여기는 사회는, 결국 말하는 이가 사라지는 사회가 될 테니까.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아무리 가져가고, 날조한들. '누가'쓰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의 감정에 꽃을 심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글 쓰는 것을 놓지 못한다. 이 문장을 누군가는, 진심으로 읽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글이 '누구의 것인지 묻는 사람'일 거라는 희망 때문에.


저작권은 창작자의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한, 아주 오래된 예의다. 당신의 ‘좋아요’ 앞에, 그 문장을 만든 사람의 밤을 함께 기억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덜 지워질지도 모른다.


그 밤. 창작자는 사라졌고, 그가 남긴 문장은 마치 누구나 쓸 수 있는 ‘유행어’처럼 소비된다. 그런 세상에서 남겨진 글은, 점점 감정이 없어진다. 진심이 없고, 상처가 없고, 치유도 없다. 그렇다보니 당연하게도, 그저 ‘좋아요’에 최적화된 문장만이 살아남겠지. 하지만 글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글이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위로였고, 고백이었고, 기록이었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이 좋아한 그 글은, 정말 아무나 쓸 수 있는 말이었을까. 그 문장을 쓴 사람의 노력과 진심은, 정말로 아무 의미 없었을까. 누구도 묻지 않기에, 다시 쓰기로 결정한다.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의 글 한자락을 읽고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누가 썼나요?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요.”


당신은 지금, 누구의 문장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장을 보고 어떤 '감정의 꽃'을 피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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