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시원하게 소나기가 오고 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나니 언제 더웠냐 싶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다. 20년 전에는 강원도에 살았었지. 넌 추운 걸 싫어해서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었다. 그러다 섬진강이 보이는 곡성에 갔을 때 너무 예쁜 경치에 반해 나이 들어 이곳에 와서 살고 싶다 했었는데. 꿈을 이루었구나.
시험 앞두고 연습하려고 가져온 꽃
20년 전에는 너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20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아이들과 홀로서기를 하는 시간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하고 너무 철이 없었나 싶기도 하다.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 참 용기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잘 커서 큰아이는 벌써 20년 전의 내 나이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며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구나. 둘째는 꿈이 없다며 열심히 핸드폰 가지고 웹툰과 웹소설을 읽고 그림만 그리더니 삽화 작가가 되었다. 그건 자기 꿈이 아니라고 그렇게 우기더니 결국 하고 싶은 건 그림이었어. 막내도 그림을 전공해서 큰언니와 함께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딸들이 다 미술을 한다고 할 때, 나는 그림이 지긋지긋했다. 아빠가 직업 화가로 고생한 걸 봐왔기 때문에 하지 않았으면 했어. 그래도 세상이 달라져서 예술가가 대접을 받는 시대가 와서 다행이다. 로봇들이 다 해주는 시대에 예술의 영역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니까.
겨울이 되니 베란다가 자연 꽃냉장고가 되었다
여름꽃을 정리하고 가을꽃을 심었더니 꽃봉오리를 올리느라 바쁘구나. 좀 있으면 정원 가득 꽃이 필 것 같다. 너는 왜 꽃이 그리 좋았을까? 한참 꽃을 배울 때 매일 꽃을 가지고 오면서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집안 가득 꽃으로 채워졌지. 아이들은 너무 많으니 누굴 주라 해도 주지 않았어. 아까웠다. 속으로 생각했지 '이래서 어떻게 팔지? 아까워서.'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건 살아 있는 생명이라 좋아한 것 같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햇빛을 비춰주고 물과 양분을 주면 시간이 지나 쑥 자라 있는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껴서. 거기서 너무 아름다운 색감의 꽃을 피워주면 너무 행복했다.
꽃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온 지 20년이다. 20년 전과 후 너의 삶은 참 많이 달랐지. 20년 전 너의 자아는 남들이 보기에는 밝고 당당했지만 늘 무언가에 주눅이 들어있었어. 그래서 너의 자아와 싸우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싸우며 넌 큰 결심을 했지. 가장 힘든 것을 내려놓자. 내려놓고 나니 넌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 둘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혼자가 된 후에 더 외롭지 않았어. 애들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20년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지. 헤어진 후 시간이 지나 보니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문제는 아니더라. 맞지 않았을 뿐.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큰 결심을 하고 꽃으로, 글로 치유를 받다 보니 주변의 인간관계도 다 바뀌었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사는데 자신감도 생겼어. 꽃과 글, 두 가지가 나를 변화하게 했다. 꽃으로 정서적 안정을 찾았고 안정이 되니 글이 써졌다. 꽃으로 글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자 결심했어.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니 책도 쓰고 강연도 나가며 점점 더 내 주변은 사람으로 가득 차더라. 20년 전의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속에 보이지 않은 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했었어. 그러나 달라졌지. 지금은 선이 뭐야, 그냥 문을 활짝 열었단다.
그동안 치열하게 사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주변을 돌아보며 쉬엄쉬엄해. 그래도 된다.
연말에나 발행해야지 하고 고이 모셔둔 글인데 내일이면 12월 1일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서
발행해본다.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고지를 점령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겠지만 새로운 꿈을 위한 도전은 언제나 두렵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