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집사의 에피소드
그녀를 버렸다. 포기했다고 해야 하나? 나와 함께 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15년은 족히 넘은 듯하다. 잎사귀 두 개의 줄기가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 되는 아이를 선물 받았다. 토종이고 귀한 아이라고 건네받을 때는 이름을 알았는데 선물한 사람도 나도 나중에는 이름을 잊었다. 난종류겠거니, 아니 토종산세베리아라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지인은 서너 명에게 그 아이를 선물했는데 다 죽고 나만 그 아이를 키우고 있다 했다.
그 아이는 좀 까다로웠다. 햇빛을 쬐라고 노지에 내놓으면 잎이 타버리고 물 주는 시기도 맞추기 힘들었다. 떡잎이 진 겉잎을 떼고 나면 속에서 파처럼 잎이 나왔다. 잎의 개수가 늘어나다가도 관리를 잘못하면 제일 바깥쪽잎이 노래진다. 노래진 잎을 떼내고 나면 속에서 다시 잎이 나온다. 그러기를 여러 해 반복하다 보니 줄기가 제법 굵어져서 지금은 오백 원 동전 보다 굵다.
그녀의 이름은 문주란이다. 문주란은 수선화과의 여려해 살이 풀이다. 주로 아열대 지방에서 서식하는 구근식물인데 세계적으로 130여 개의 품종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제주도 토끼섬에 자생지가 있고 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꽃은 7-8월에 피고 향기가 좋다. 꽃은 오래가지 않고 3-4일 내에 시든다. 꽃이 시들고 나면 열매를 맺어 씨앗으로 번식도 가능하다.
나의 문주란은 7년 전쯤 한번 꽃을 피워주었다. 그제야 검색을 해보고 문주란인 것을 알았다. 예쁘지도 않고 잘 자라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기에 물을 주고 볕을 주었다. 꽃이 피고 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정성껏 돌볼걸. 그 후로는 아직 꽃을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환경이 잘 맞지 않는지 여느 때처럼 잎이 6-7장 정도 되었다가 몇 개가 시들어 떼내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잎에 벌레가 꼬인 게 보였고 현관밖으로 격리를 시켰는데 초록이었던 잎들도 다 누렇게 변해버렸다. 벌레가 무엇인지 보기도 싫었다. 일단 내가 아는 흔한 벌레는 아니었다. 온실가루이, 진딧물, 뿌리파리, 응애도 아닌 먼지처럼 작은 검은 점이 기어 다녔다. 딱 포기하고 싶었다. 버리기로 맘먹고 아파트 화단으로 가서 화분을 엎었다. 헉! 뿌리가 너무 멀쩡해서 깜짝 놀랐다. 그래도 맘 다잡고 버리고 왔다.
이틀이 지난 뒤 문주란 생각이 났다. 퇴근길에 가보니 아직도 뿌리가 멀쩡하다. 죄책감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 뿌리를 좀 정리하고 토분에 다시 심어주었다. 잎이 말라버린 줄기 끝은 잘랐다. 그 안에서 새순이 또 자라 주리라.
식물이 병이 드는 경우는 과습이나 통풍불량이 제일 많다. 아마도 나의 문주란은 통풍불량으로 벌레가 꼬인 듯하다. 통풍이라는 것이 창문을 열어 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흐르게 해 줘야 한다. 선풍기나 써큘레이터를 틀어 공기가 순환되도록 해주면 좋다. 식물이 약하면 벌레에 노출되기 쉽다. 오래 함께 하다 보니 다른 새로운 아이들에게 신경 쓰느라 구석진 곳에 두었더니 병이 온 것이다. 일단 통풍이 잘되고 적당히 해가 드는 뒷베란다에 두었다. 더 망가지지는 않는지 매일 봐줘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물들부터 살핀다. 퇴근 후 베란다로 가서 물이 마른 아이는 없는지 눈으로 쭉 스캔한다. 물이 고픈 아이가 있으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물을 주고 있다. 시든 잎을 정리해 주고 영양이 부족한 것 같으면 영양제를 준다. 가끔 귀찮을 때도 있다. 다 버려버릴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초록은 나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준다. 식물을 돌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 아이들이 자라기 좋은 환경으로 어서 이사 가고 싶다. 각자 적재적소에 알맞게 심어놓고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골로 이사를 가리라. 삼 년만 참으면 되는데 시간이 참 더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