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 칭다오로, 언니는 대만으로 각자의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약 10일 정도 따로 여행을 했는데 서로 잠을 잘 못 잤다. 거의 10여 일을 잠을 못 자고 똥도 잘 못 쌌다. 언니도 그랬다고 한다. 무엇보다 엄청 심심했다. 평소 같으면 쉴 새 없이 아까 먹은 지엔빙에 대해 맛을 이야기하고 오늘 뭐 먹을지 재잘거리고 내가 느낀 것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할 텐데 그럴 대상이 없으니 심심했다. 하지만 그 고독감도 좋았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일기로 쓰며 혼자서 여행하는 즐거움을 온전히 느꼈다.
하지만 겁이 많았던 우리인지라 미리 끊어놓은 태국행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방콕에서 다시 만났다. 이후로 쭉 같이 여행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고 가장 이해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여행을 하며 언니와 매일매일 싸웠다. 정말 서로를 너무 이해 못 해 상처 주고 상처받았다.
평소에도 이렇게까지 자주 크게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여행을 하며 몸이 힘들고 마음도 지치니까 쉽게 갈등이 생겼다. 엄연히 다른 존재임에도 나도 모르게 언니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속 깊이 서로를 이해 못 해 할퀴고 상처받았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무리 크게 싸워도 24시간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화해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치앙마이에서는 한방에서 자다가 서로 너무 상처를 줘서 서로 등 돌려 훌쩍이며 잤다. 평소같이 지낼 때는 누군가 먼저 다가가 괜찮냐고 말 걸며 또 풀렸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언니가 훌쩍이며 몸을 들썩이는 걸 알면서도 나도 훌쩍이며 몸을 들썩이며 서로 등 돌려 잤다. 나는 화가 나거나 불만이 생기면 바로 티가 난다 그래서 싸우더라도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니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참이 있다가 정말 사소한 문제 하나로 빵 터져버리는데 나는 황당하다. 이전의 모든 것들이 쌓여 터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터져 힘들어하는 언니를 보며 나도 힘들었다. 싸우더라도 화해를 해야 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또 화해를 하며 여행을 이어나갔다.
‘쌍둥이들은 텔레파시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는데 우리도 궁금했다. 태국에서 여러 번 일어난 일인데 크게 싸우고 오늘은 각자 여행하자고 마음먹었다. 잠은 같이 자더라도 하루를 서로 다르게 보내보자고. 그런데 해가 질 시간쯤에는 어김없이 한 골목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도 어쩜 그렇게 비슷했을까 꼭 마주쳤다. 서로 연락할 수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직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텔레파시가 통해버릴 땐 그저 빵 터져 웃어버렸다. 우리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실소가 터지며 백기를 들곤 했다.
태국에서 한 달 반을 여행한 뒤 우리는 중국으로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일도 했었는데 중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더 알고 싶었다. 특히 대도시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많은 중국 같지 않은 중국을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땅 중국 윈난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중국 윈난성의 쿤밍이라는 도시에서 우연히 차 시장에 들렀을 때였다. 한 중국인 아저씨가 “너네 쌍둥이면 이 근처에서 열리는 쌍둥이 축제에 참가해 봐”라고 하셨다. 처음 듣고는 “우와 그런 게 있어요? 와 진짜 신기하다” 정도의 반응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인데 그 장소가 여기서 멀지 않다. 또 기간이 마침 1주일쯤 뒤다’라는 소리를 들으니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참여 신청을 해도 되나 생각했지만 우리는 일단 해보자 마인드로 신청을 했다. 사실 신청하고 별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쌍둥이 축제 담당 직원이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받아봤는데 담당 직원 왈, “한국 국적은 당신들이 유일해요. 게다가 쌍둥이들은 vip 대접을 받아요. 3일간의 숙박, 음식, 교통이 다 제공됩니다.”
배낭여행자들에게 3일간의 숙식제공은 얼마나 큰 매력인가. 머릿속으로 살짝 계산해 봐도 우리 여행비가 굳겠다 싶어 바로 가겠다고 했다.
담당자가 보내준 참여 국제 쌍둥이 명단의 사진을 봤는데 온갖 국적의 쌍둥이들의 화보가 있었다. 다들 유명한 쌍둥이들 같았다. 그 수많은 멋진 쌍둥이들 가운데 우리 사진만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사진 같아 좀 자신감이 내려갔다. 하지만 우리 말고도 유일하게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셀카를 올린 강적이 있었으니 바로 강대국 미국에서 온 쌍둥이들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정말 대충 찍은 셀카를 수많은 화보 가운데 보게 되니 우리는 웃으며 “와 이 강대국 미국도 이렇게 오는데 우리는 이 정도면 양반이네” 하며 위안을 얻었다.
사진 속 쌍둥이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옷을 찾기 위해 쿤밍 시내를 뒤졌다. 처음에는 한복을 구해보려 했으나 쉽지 않아 그냥 똑같은 옷을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5시간 정도 가서 ‘묵강’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쌍둥이 축제가 이 도시에서 개최되는 이유는 바로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쌍둥이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묵강에서는 수많은 쌍둥이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도 쌍둥이 출산율이 가장 높은 도시라고 한다. 왜 쌍둥이가 많은지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지만 이곳의 쌍둥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면 쌍둥이가 자주 임신된다는 전설이 있다. 쌍둥이 축제 때 이곳은 전 세계, 중국 각지에서 모인 1000여 쌍의 쌍둥이들로 성황을 이룬다. 축제가 개최되는 3일 동안 우리는 많은 쌍둥이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많은 쌍둥이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가수 쌍둥이, 개그맨 쌍둥이, mc 쌍둥이, 댄서 쌍둥이, 모델 쌍둥이 등 수많은 쌍둥이들의 직업이 같았다. 평범한 직업조차 같은 쌍둥이들도 많았다. 같은 은행에 다니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쌍둥이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서로 떨어지려 했던 우리는 여러 쌍둥이들을 만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떨어지려 했던 걸까? 저렇게 함께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데’
여기도 쌍둥이, 저기도 쌍둥이인 신기한 풍경 속에서 많은 쌍둥이들이 ‘함께 있을 때 더 빛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쌍둥이들 중 유독 한 쌍둥이들과 계속 자주 만나게 되었다. 바로 미국 쌍둥이였다.
우리에게 대충 찍은 셀카로 위안을 줬던 그 미국 쌍둥이들은 다른 쌍둥이들과 달리 옷도 다른 옷을 입었다. 우리는 수많은 쌍둥이 축제 스케줄 중에서 몇 번 우연히 자리가 겹쳐 옆에 앉게 되었다. 동갑인 데다 서로 유창하지 않은 중국어로 서로 대화를 하다 보니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축제가 끝나고 미둥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대학교도 같이 둘러보고 청강을 하기도 했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길을 걸을 때면 형은 언니와, 동생은 나와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는 아직 서로를 완전히 구분하고 있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렇게 걷고 대화를 해서 이후에 서로가 신기해했다.
우리가 친해지면서 함께 말레이시아 여행을 하게 되었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페낭에 도착해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숙소 앞에 도착했는데 문이 아직 안 열려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동생 제프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빵 터져 웃는 것이었다.
다들 의아해하자, 언니가 “저 표정 내가 여행하면서 수정이한테서 매일 보던 표정이잖아!라고 했다. 동생 제프도 나처럼 힘들면 힘든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언니는 제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세상에 저런 인간 하나 더 있구나’ 하며 나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반면 힘들어도 티가 안 나고 자기가 힘든 줄도 모르는 언니가 형인 멧과 비슷하게 보였다.
미둥이에게 ”너네는 안 싸워? “라고 물었을 때 ”우린 안 싸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인데 왜 싸워? “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와 언니는 여행한 지 3개월 만에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왜 매일 그렇게 깊게 싸웠을까.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이인데 말이야. 미둥이들과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언니와 나는 싸우지 않았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이좋게 다니는 미둥이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고 더 애틋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미국인 친구들은 처음인. 데다 이성친구가 거의 없는 우리에게 더욱 신기한 인연이었다.
이후 미둥이들은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우리는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떠났다. 약 2달 정도를 떨어져 있다가 미둥이들이 우리에게 미국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몇 개월 후면 그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미국에 언제 다시 갈지 모르니 지금 자신들이 있을 때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너무 멀었고, 우리 여행 중에 계획에 전혀 없던 나라여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때 언니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난 지금 얘네 안 만나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돈과 시간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나는 결국 언니의 직감에 따르기로 했다.
2018년 2월은 정말 길 위에서 죽으리라라는 생각으로 여행을 시작하던 때였다. 그땐 정말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여행하다 죽으면 그럼 그것도 꽤 낭만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으니 말이다. 삶에 특별한 애착도 없었으니 여행할 때 특별히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강한 열망이 있긴 했었다. 바로 사랑, 사랑이 대체 뭘까.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뜨겁게 하는 사랑도 궁금했고, 나를 사랑하라는 그 사랑도 궁금했다. 그게 대체 뭐지? 어떻게 하는 거지?
그전에는 서점에 가서 ‘나를 사랑하라’라는 책들을 꽤 봤다. 강연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나를 사랑한다’라는 개념은 더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여행을 하기 시작하며 의도적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계속 괴로워하는 내가 안타까웠다.
그쯤 시작한 명상에서도 나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법을 배웠다.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를 비난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려 하지 않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은 다시 봐도 기분이 좋았다 내 스스로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귀엽게 보이기 시작하면 끝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맞다. 나 자신을 귀엽게 보기 시작하자 정말 나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랜 습관들로 자학하는 말버릇과 상대를 비난하는 말버릇은 여전했다.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나와 언니는 깊은 갈등과 화해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미둥이를 만나면서 우리의 관계는 더욱 좋아지기 시작했다. 늘 투닥투닥하고 다시 화해하던 우리의 관계에서 이제 서로를 비난하는 말버릇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요즘에는 심지어 언니가 귀여워 보인다. 귀여워 보이면 끝이다. 정말.
내가 이렇게 말하니 제프는 “나는 멧이 안 귀여워 보이는데”라고 했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서로의 귀여움을 알아차리게 발견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