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블런의 유한계급론으로 뜯어본 과시욕과 상대적 빈곤감
사람들은 왜 그토록 이른바 '상급지' 아파트에 목을 매는 걸까.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 역시 왜 그토록 상급지로의 진입을 꿈꾸며 욕망하는 걸까.
인프라? 학군? 직주근접 때문인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강남에 양질의 일자리가 몰려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팩트이고, 대치동이 대한민국 최고의 학군이라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인프라를 누리고,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고 싶은 욕심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지독하리만치 솔직해져 보자.
정말 오직 그 이유뿐일까? 자연환경이나 쾌적한 상권이 전부라면, 굳이 중심부가 아니더라도 공원과 대형 쇼핑몰을 곁에 둔 가성비 좋은 대체재는 수도권 외곽이나 지방에도 차고 넘친다.
학군과 직주근접이라는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들. 그러나 그 두꺼운 명분들을 한 꺼풀 더 벗겨내고 들어가면, 그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한 대답은 결국 하나다.
'과시하고 싶어서'
'계급을 구별 짓고 싶어서'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넘어, 나와 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더 높은 계층(이너서클)으로 편입하고 싶은 지독한 신분 상승 욕구인 셈이다.
100여 년 전,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남긴 서늘한 통찰은 지금 내 뼈를 정확히 관통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진짜 목적은 '생존'이 아니라 '명예와 사회적 지위의 과시'라고 일갈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장롱 속에 숨겨두면 타인의 존경을 받을 수 없으니, 기를 쓰고 비싼 것을 사서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과 우월성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과시적 소비'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상급지에 목을 매는 진짜 이유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주변 지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나 이만큼 성공해서 이렇게 좋은 동네에 번듯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 한 단계 높은 계급에 올라섰음을 확인받고 싶은 밑바닥 욕망이 정확히 그러하다.
이 과시욕과 구별 짓기의 본능은 거대한 부동산뿐만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 속에도 촘촘하게 박혀있다.
특히 명품의 셈법은 베블런의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수천만 원짜리 롤렉스나 샤넬백의 로고가 가방 안쪽에 숨겨져 남들이 알아볼 수 없게 디자인되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오픈런'을 해가며 사고 싶은 욕망이 들까?
절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물건의 기능이나 실용성을 사는 게 아니라, 그 물건이 대변해 주는 '나의 위치(과시)'를 산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의 아주 작은 단위, 평범한 일상 소비를 들여다봐도 이 얄팍한 꼬리표는 늘 붙어있다.
최근 굳이 기능의 절반도 다 쓰지 못할 아이패드를 산 이유도 마찬가지다. 타격감? 호환성?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른다. 오히려 갤럭시만 써온 나에겐 UI조차 낯설어 불편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굳이 아이패드를 고른 이유는, 예쁜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작업할 때 어쩐지 조금 더 있어 보인다는 그 알량한 하차감 때문이었다.
내가 남보다 잘 살고 싶은 이 과시의 본능은 필연적으로 '상대적 빈곤감'이라는 쌍둥이 형제를 데리고 다닌다. 베블런은 이를 '차별적 비교(Invidious Comparison)'라는 기가 막힌 용어로 설명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배가 부르다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내 이웃보다 잘 나가야 (돈이 많든,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든) 비로소 만족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남들이 나보다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내 재산이 그대로여도 극심한 상대적 빈곤감(박탈감)을 느끼고, 그걸 극복하려고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무리해서 과시적 소비를 흉내 낸다.
과거에는 그 비교 대상이 기껏해야 친인척이나 담장 너머 이웃사촌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SNS라는 매개체 탓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지인의 지인을 넘어, 생면부지의 동년배들, 심지어 지구 반대편 외국인들의 가장 화려하게 편집된 일상까지 내 스마트폰 안으로 무차별하게 쏟아진다.
비교의 반경이 무한대로 확장된 세상에서, 우리는 매일 타인의 하이라이트를 목격하며 알게모르게 쫓기는 심리에 시달린다.
부동산뿐만 아니라, 주식 시장에서도 이 '차별적 비교'의 본능은 가장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큰 수익을 냈음에도 시장 평균 지수를 쫓아가지 못하면 끔찍한 포모(FOMO)와 괴로움에 시달린다.
반대로, 내 계좌가 피를 흘리고 있더라도 시장 전체가 폭락해 남들이 나보다 더 큰 손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 손실 자체의 아픔보다 "내가 남들보다는 덜 아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게 인간이다.
작년과 올해 장이 좋아 큰 수익을 내고도 내가 그토록 조급함과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렸던 이유. 그것은 내가 너무나도 징그러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에서 연륜 있는 노인들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내심이 강해서일 수도 있고, 행동력의 노쇠화로 인해 잦은 매매를 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별적 비교'에 시달릴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보통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고 포트에 과감히 변화를 주거나 레버리지를 끌어다 급등주를 쫓아가면, 결국 시장의 제물이 될 뿐이다.
이 징그러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복'이란 불가능하다.
내가 다른 동물로 변할 수 없듯,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징그러운 인간의 욕망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야 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남들에게 맘껏 과시하고 싶어 안달 난 인간이고, 옆 사람과 끊임없이 차별적 비교를 하며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는 아주 나약한 인간임을 처절하게 인정하는 것. 그 인정으로부터 비로소 멍청한 실수를 줄이는 방어 기제가 작동한다.
남들 앞에선 아닌 척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나는 부동산 상급지를 보면 배가 아프고, 주식 시장이 오르면 포모에 시달리며, 맘껏 내 성공을 과시하고 싶다.
참으로 나약하고 촌스러운 본성이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내 밑바닥의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 얄팍한 과시욕과 빈곤감의 뿌리를 파고들다 보면, 결국 그 끝에는 '내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은' 지독한 결핍이 웅크리고 있다. 타국이라는 낯선 야생에 떨어져 고립되고 나서야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그 지독한 존재감의 굴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 적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