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여름
성북동 길상사
7월이 되니 옆집 담벼락에 능소화가 가득 피었습니다. 주홍빛 능소화가 피어나면 진짜 여름입니다. 능소화를 보니,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생각났습니다. 친구가 여름이면 길상사에 능소화가 예쁘게 핀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마침 서울 올라갈 일이 있었고, 서둘러 길상사로 향합니다.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여러 방법이 나옵니다. 저는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길상사로 향합니다. 마을버스는 성북동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커다란 단독주택들이 많습니다. 사이사이 외국 대사관도 있고요. 나무도 많고, 담쟁이 덩굴도 있는 것이 분위기가 고급집니다.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촬영하는 장면도 우연히 보았습니다.
길상사에 도착합니다. 관광지가 아닌 수행하는 공간이기에 별도의 입장료나 관람료는 없습니다. 입구에는 짧은 치마, 반바지를 입고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가 있습니다. 짧은 옷을 입고 왔을 때는 종무소에서 랩스커트를 착용해 달라고 합니다. 바른 복장을 하는 것은 수행하는 공간을 찾는 이의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여름이기에 더욱 주의가 필요합니다.
경내로 들어서서 관세음보살을 만납니다. 보통의 절에서 만나는 커다란 관세음보살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성모 마리아 느낌도 있습니다. 알고봤더니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작가가 만들었답니다. 불교와 천주교 종교 간의 화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준다고 합니다. 중생의 소리를 듣고, 소원을 이루어준다고도 하고요. 관세음보살 앞에서 제 마음의 소리를 전해봅니다.
관세음보살 오른쪽으로 가면 멋진 석탑이 보입니다. '길상7층보탑'으로 석탑의 이름을 적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탑입니다. 원래 길상사에 있던 탑은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이랍니다. 길상사가 원래 절이 아니었으니까요. 탑신부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였습니다.
길상사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보면 언덕길이 있습니다. 언덕길 담벼락에는 푸르른 잎이 덩굴을 이루고 있습니다. 덩굴에 능소화가 피어 있는 그림을 상상하고 왔는데, 능소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사이 몇 송이가 피어 있긴 하지만, 제가 생각하던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여름에 담장을 끼고 피어나는 능소화를 좋아합니다. 주황빛의 꽃잎은 화려하면서도 수줍은 미소가 좋습니다. 길상사를 깊이 들어갈수록, 능소화를 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길상사는 꽃이 없더라도 길상사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을 지날 때는 말 없이 발소리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지납니다. 길상사는 절에 왔다기보다는 숲에 온 기분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듯이 수많은 나무가 서로서로 맞잡으며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새롭고 놀라웠습니다.
길상사 제일 위에 진영각이 있습니다. 진영각은 무소유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곳입니다. 당시에는 행지실이라 불렀고, 이후에 진영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진영각 옆으로 스님의 유골을 모셨습니다. 진영각 안에는 법정 스님의 유언장,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 진영(초상화)을 바라보는데 강직하시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내부 사진 촬영 금지.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 또한 진리라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만을 간직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침묵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서 조용히 명상하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 없이 저 혼자 침묵의 집 안에 있습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여름 햇살이 들어옵니다. 푸른 나뭇잎이 바람결에 흔들립니다. 가만히 앉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습니다.
길상사는 본래 절이 아닙니다. 요정입니다. 김영한님의 시주로 요정이 절이 된 것입니다. 김영한님은 16세에 기생이 됩니다. 해방 후 성북동 기슭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크게 만들고 성공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합니다. 1987년 법정스님에게 대원각 터 약 7천 평, 건물 40여 채를 시주하면서 절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시세로 1천 억원이었답니다.
스님은 제의를 거절하였답니다. 1995년이 되어서야 시주를 받아들이고, 길상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김영한님에게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습니다. 김영한님은 1999년 세상을 떠나셨고, 화장하여 길상사에 뿌려졌습니다.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님과 천재 시인 백석과의 러브스토리는 유명합니다. 두 사람은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석은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백석은 김영한님을 '자야'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를 향한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백석은 해방 후 고향인 함경도에 머물렀습니다. 전쟁 후 남과 북으로 갈라졌기에, 두 사람은 더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김영한님은 백석 시인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백석의 생일날에는 식사를 하지 않고 백석을 기다렸다고도 하고요. 대원각을 시주할 때 1천억 원이라는 돈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는 말도 유명합니다. 김영한님의 기부로 백석문화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직 사랑할 줄 모르는 저는 사랑의 의미를 깊게 생각해봅니다.
지장전으로 향합니다. 지장전 맨 아래층은 선열당입니다. 스님과 불자들의 공양간입니다. 가운데 층은 다라니다원이라는 북카페입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맨 위는 지장전입니다. 지장전 앞에서 바라보는 길상사의 풍경도 좋았습니다. 작은 연못에 연꽃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 길상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많습니다.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하신 절도 길상사입니다. 이번에 찾은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있습니다. 한때는 요정이었다지만 지금은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법정 스님, 길상화님, 백석시인 등 대인들이 스토리가 함께 하기에, 길상사는 더욱더 애틋하고 찾고 싶은 명소입니다. 더불어 계절마다 가봐야 한다는 그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