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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by ondo

동네 책방에서 <첫 여름, 완주>를 사서 읽었어요.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에서 출간한 김금희의 소설입니다.


저는 유명인의 인지도에 홀려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박정민과 김금희의 조합이라니 궁금하잖아요. 매일 인터넷 도서관을 들락날락해보지만 신작이라 언제 입고될지, 입고된다고 해도 예약은 몇 번째로 할 수 있을지, 연체하는 빌런이 도중에 있을지도 모르고. 과연 올해 안에 빌려볼 수 있을지 요원하고요. 나날이 조급증이 심해지고요. 네, 애가 타서 그냥 책방에 가서 사게 된 것입니다.


내년 아이 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사를 생각 중인 저는 몇 달 전부터 책을 사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당분간 빌려 읽고, 종이책을 ‘내돈내산’으로 응원하는 마음은 새로운 터전에 정착한 뒤에 잇는 걸로 마음먹었거든요. 침대 옆 사다리꼴 책장에 칸칸이 꽂혀있던 책들도 열 권씩 묶어 내놨고요. 그런 제가 박정민 씨와 김금희 씨의 이름값에 휘둘려(?) 책을 사버렸네요.


그런데 책을 펼쳐보고 당황했습니다. 이 책은 대본집이랄까, 희곡에 가까운 장르예요. 저는 책도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읽기 전에도 사전 정보를 되도록이면 눈에 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흐린 눈으로 더듬더듬 책을 삽니다.


뒤늦게 찾아보니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이라고 하네요. 박정민의 아버지가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드리다가 그를 위한 책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하고, 작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수많은 이메일을 쓰고, 드디어 책을 내고, 홍보를 하는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단지 운이 좋은 인생이라고 쉽게 내려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몸을 움직여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물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지 어른이 된 저는 알게 되었으니까요. 인생은 만화가 아니잖아요. 어떠한 서사가 얼마나 이 책 안에 많이 들어있겠습니까. 자식을 낳듯 책을 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2025년 첫 여름을 완주한 이는 손열매가 아니라 다름 아닌 박정민 씨 아닐까 싶습니다. 짝짝짝.


출판 계기를 알게 되고 제 마음에 스며든 온기와 출판사 사장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는 결이 다르게 저는 책을 열자마자 미음이 조금 식었습니다.

차라리 배우들이 녹음한 파일을 듣는 게 더 낫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희곡이랄까, 시나리오 장르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저는 서술형 텍스트가 익숙하기도 하고,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제가 직접 마음에 그리는 문장 사이의 대화가 더 좋아요. 그래도 어쩝니까. 샀으니 읽어봐야죠. 책은 얇아요. 생김새도 만화책 같아서 책을 집어들 때 부담감은 제로입니다.


저는 배부르지만 먹는 디저트처럼 다소 시큰둥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은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지만 여름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저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분위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선 여름의 냄새가 납니다.


비에 젖은 이끼 냄새, 싱그러운 여린 잎의 냄새, 청량한 초여름의 밤 냄새, 달큼한 흙냄새, 목재로 지어진 별장 바닥에서 올라오는 오래된 먼지 냄새 같은 여름의 냄새요.


아쉽게도 이 책에서 여름이 후각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먹어도 먹지 않아도 그만인 식후 디저트 케이크 같은 책이랄까.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혹시라도 제 글이 출판사 무제 직원과 사장님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린다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은데… 취향이라서 어쩔 수 없네요.


저는 <대온실수리보고서>를 읽고서 작가가 소중한 이의 이불을 짓듯이 글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동했거든요. 저는 아무래도 정성을 많이 들인 글을 더 좋아하나 봅니다.


쉬어가는 책으로 읽기 좋아요. 쉬는 건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고 시간은 없어서 발을 동동거리며 틈틈이 더 읽으려고 하니까.


아! 도통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크느라 애를 쓰는 청소년들에게 사주고 싶은 책입니다. 저에겐 그런 책이네요.


어쨌든 출판사 무제를 응원합니다.

젊은이의 눈부신 약진에 저는 감화되어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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