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퇴촌면은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애기 머리 같은 모가 심긴 논에서 목이 긴 왜가리, 백로 같은 하얀 새들이 인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 활동에 열중이다.
아들은 아침부터 뜰채와 채집통을 들고 논으로 나왔다. 논물을 들여다보니 올챙이와 장구애비, 거머리와 새우, 깨 같기도 하고 먼지 같은 것들이 모여 둥글게 둥글게 돌고, 질주하고, 헤엄친다.
아이의 눈은 열중할 때 더 까맣다. 제가 잡고 관찰할 대상을 포착하면 놓칠세라 드는 숨 나는 숨도 허투루 쉬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집중할 때 발산하는 기가 느껴지면 입을 닫는다.
나는 선이 명확하고 외양이 단정한 생명체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괜찮다고 해야 할지. 다리는 두 개부터 여섯 개까지 오케이. 무족류라 배로 긴다거나 여덟 개 이상의 다리가 달린 것들을 고운 눈으로 들이는 건 어렵다. 딱정벌레목의 곤충은 눈에 담기 편안하여 오케이다.
아들은 거의 모든 생명체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서는 데 스스럼없다. 오히려 동족인 인간에게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논에 고인 물 안엔 난생처음 보는 생명체가 가득 들어있다. 단번에 이름을 댈 수 있는 생명체엔 거부감이 덜하다. 논물 속 생명체 중 절반은 이름 모를 것들이다.
나는 마땅히 설 곳 없는 논비탈에 기우뚱 몸의 균형을 간신히 잡고 아이가 시키는 대로 채집통을 들고 섰다. 오늘따라 왜 벤시몽을 신었을까. 축축한 논바닥을 디딜 때 후회하지만 사방에 물러설 곳이 없다.
논물 안에 뱅뱅 도는 깨알 같은 것들의 정체가 무언지 코가 빠질 새라 들여다보다가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손에 들고 있던 젤리통이 떨어지면서 데구루루-
팔이 조금 더 길었거나 순발력이 조금 더 있었다면 논두렁에 빠지기 전에 통을 촤악 멋지게 잡아챘을 텐데. 달리기, 체력단련 시합 만년 꼴등인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젤리통도 벤시몽도 논 속에 처박혔다.
5년 넘게 신은 벤시몽의 고무창과 천 사이 벌어진 틈 속으로 뻘 같은 것이 밀고 들어왔다. 벤시몽은 엄마 신발인데 하필 오늘 내가 신었다.
차가운 버터크림 같은 젖은 흙이 발등을 덮고 발바닥 안을 파고들어 왔다. 이 흙은 저 하얀 새의 깃털을 윤기 나게 만들고 포동포동 살을 찌우는 영양분이 가득한, 미생물이 풍부한 토양이겠지. 내 발에는 필요 없는.
나는 낯설지 않지만 좀처럼 접하지 않는 질감을 마주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을 쉬고 어떡해, 어떡해 해 보지만 나의 아들은 내 발을 한번 쓰윽 보더니 제가 하던 일을 계속한다.
나는 이 성의 없고 무신경한 반응에 화가 났다. 일곱 살이지만 아직 어리다고 하지만 어미가 지금 발이 빠져서 속이 상한데 너는 괜찮냐고 묻지도 않는 게냐! 아들놈은 아들놈이지. 나는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쏟아내고 아이를 쏘아본다.
“엄마 지금 기분 안 좋아. 신발 다 버렸어. 집에 가고 싶어.”
“힝-싫은데.”
강아지 울음 같은 소리를 무성의하게 내면서도 올챙이와 장구애비 잡기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애를 뒤로하고 비탈을 올라 도로 위에 철퍼덕 앉아 치솟는
감정을 아래로 가라앉혔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그래, 퇴화되었거나 미성숙한 대근육을 가진 이 어미 탓이지. 논 바닥에 벤시몽을 신고 온 생각 없는 이 어미 탓이지.
마침 친구가 아이스커피 배달을 왔다.
내 꼴을 내려다보더니 엄마는 역시 극한 직업이네요,라고 두 번 반복해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어쩐지 위로가 되고 마음이 가라앉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벤시몽, 안녕.
진짜 벤시몽의 주인인 나의 어머니 죄송합니다.
신발을 함부로 신는 나쁜 습관은 엄마가 된 나이에도 고쳐지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