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do Sep 14. 2024

빨간색 이름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지 않는 건 암묵적인 약속이다. 약속의 주체나 관계의 범주 설정은 어렵다. 요즘에도 이 미신이 보편적으로 사회를 관통하는지 알 수 없으니 그러하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 건 엘리베이터의 4층 버튼을 F층으로 표시하는 이유와 일맥의 관련성이 있다. 미신인 걸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불시에 닥칠 불운을 거르고 싶은 것이다. 그 믿음은 맹목적이지만 일상의 평온을 바라는 마음의 본바탕은 순수하다.


독일 유학을 갔을 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픽업 나온 관계자가 들고 있던 피켓에 내 이름이 빨간색으로 적혀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모든 나라에 통용되는 건 아닌가 보다.


찾아보니,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는 건 중국 진나라 때 붉은빛을 상서롭게 여긴 진시황이 본인 외에는 붉은빛을 못 쓰게 한 것이 전해져 내려왔다는 설이 있고, 단순히 사람의 혈액과 같은 색이라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 전쟁 때 전사자의 이름이 빨간색으로 적혀 있던 것이 구전되어 그렇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건 없고 다 설이다.


왜 미신은 뼛속까지 배어드는지 나는 여전히 내 이름이나 다른 이의 이름을 ‘절대’ 빨간색으로 쓰지 않는다. 펜의 색깔도 다양한데 굳이 빨간색으로 쓸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굳이 빨간색을 피할 이유는 없는데 찜찜해서 안 쓴다.  


빨간색의 이름이 죽음을 떠올리니 그렇다. 초등학교 다닐 때 분신사바(귀신 소환 놀이)를 하며, ‘점괘’를 보고 싶은 아이의 이름을 빨간색 펜으로 썼다.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한 들뜬 호기심과 초자연의 신비를 몸소 경험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나는 짝꿍의 이름을 자못 진지하게 빨간색 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그 분명했던 목적 외에는 이름을 빨간색으로 쓴 적이 없다. 상대의 이름을 빨간펜으로 무심코(그럴 리 없지만) 썼다면? 아찔하다. 나의 세계에서는 대단한 결례다. ‘빨간색 이름=죽은 사람’ 이런 비논리적인 생각의 흐름을 여전히 고수하는 나를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변변찮은 자라고 비웃는 이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입방정을 떨어놓고는 부정을 탈까 봐 퉤퉤퉤하는 마음과 같으니 어쩌겠는가. 내 몸에 인이 박인 것과 같아서 이 미신을 그저 미신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우니.




오늘 나는 등기우편을 받자마자 뒤통수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받는 사람 란에 내 이름이 빨간색으로 쓰여있었다. 보내는 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커다랗고 뚜렷하게 빨간색 매직펜으로 쓰인 나의 이름. 회사의 주소는 검은색으로 쓰고, 나의 이름을 구태여 빨간색으로 바꾸어 썼다는 건 보내는 이의 의도가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불쾌했지만 내가 짐작하는 의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미련을 두고, 등기 봉투를 열어보았다.

나는 곧 불쾌한 흥분으로 몸이 뻣뻣해지고 손이 퍼덜거렸다.

그는 내가 발송한 서류마다 빨간펜으로 X표시를 종이 끝선에 닿을 만큼 커다랗게 쳐놓고, 하단에 ‘경고문’을 덧붙여놓았다.


OOO 씨,

‘본인이 아닌 다른 동료가 우편물을 열어보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합니다. 더 이상 연락을 한다면 사생활 보호 문제로 법적 대응하겠습니다.’


보낸 이가 내가 발송한 우편물을 받고 몹시 흥분한 상태로 ‘답변’을 쓴 것이 분명했다. 마구 휘갈겨 써놓은 글자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흥분된 순간에, 사리분별이 어려울 만큼 경황이 없는 상황에 검정펜을 내려놓고 빨간펜으로 바꾸어 쓰다니.

더구나 내 이름만큼은 정자로 또박또박 빨간색으로 잘도 써놓았다. 나를 한방 ‘멕이고’ 싶은 그 마음, 참으로 성실한 마음이다. 인정한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거나 ‘불문율’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내게 경고를 하고 싶었거나 단순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었거나.

하긴 이 사람이 내 이름만 빨간펜으로 구태여 쓴 이유를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선의가 아닌 악의의 뜻은 알 필요가 없다.  


이내 처음 느꼈던 감정이 잠잠히 내려앉고, ‘빨간색’으로 오염된 흥분도 잦아들었다. 그가 나에게 복수하고 싶고, 경고하고 싶지만 자기 모습은 철저히 숨긴 채 내게 손가락질하는 그 마음이 문득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게, 이 조직에 불만이 있으면 당당하게 직접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면 될 텐데 검정펜, 빨간펜 두 개를 필통에서 꺼내어 번갈아 쓰는 그 마음이 너무 작아서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김이 팍 샜다.


다른 지역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에게 오늘의 일을 전화로 이야기하니,


미쳤네. 야, 그럼 죽으라는 거야, 뭐야? 듣는 내가 다 기분 나쁘다. 전화해서 그게 무슨 의미냐고 따져야지! 빨간색은 죽은 사람 이름에만 쓰는 거 모르냐고 따져. 너는 진짜 물러터졌다.

이렇게 내 속풀이를 대신해 주는 이는 너덜너덜 해어진 나의 마음을 꿰매준다.


“언니, 그러면 뭐해요? 이 사람 연락처도 안 적어놨어. 자기도 무서운 거지. 숨고 싶은데 우리가 자꾸 찾으니까. 소심한 사람 같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되레 상대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동료는 나의 일이 곧 그에게 곧 닥칠지 모를 일이니, 열변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통제 태세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는 통화를 마칠 때까지 압력을 못 견뎌 곧 폭발할 압력 밥솥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고 펄펄 뛰었다.  




이 일로 밥벌이를 한 지 10년이 되었다. 헛된 수고는 없다. 애를 쓰며 견딘 시간은 허사가 아니다.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감정 쓰레기통이 커졌고, 감정 쓰레기를 처리하는 청소기도 쓰레기통의 용량에 맞게 커졌다.

처음 일했을 때 차량용만 했던 청소기가 이제는 가정용 청소기만큼은 커진 것 같다.


매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불쾌한 감정이 해소되는 시간이 확실히 빨라진 것을 느낀다. 실제로 잘 씻겨나가는지, 어딘가 껌딱지처럼 붙어서 찾기 어려운 건지 모르겠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믿는다.


나는 그렇게 나를 ‘속이고’, 위로하고, 토닥인다. 어쩌면 포기하고 놓는 것이 빠르고, 쉽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이니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늘 아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생활을 하며 요령이 느는 건지, 내적으로 성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분명한 건 무디어지는 것, 그뿐이다.







 



이전 11화 언니라고 불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