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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Sep 11. 2024

언니라고 불러도,

나는 일을 할 때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저기요, 선생님, 쌤, 아가씨, 언니, 자매님?

사회적으로 특정 직업 종사자와 성별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호칭이 많이 정리가 됐음에도 여전히 아무 여성에게나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직함이 떠오르지 않으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같은 여성이면 무작정 ‘언니’라고 부르는 게 입에 붙은 사람들이 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차라리 ‘저기요’, ‘여기요’가 듣기에 거북하지 않다.

실은 ‘저기요’, ‘여기요’도 들었을 때 썩 유쾌하진 않지만, 상대가 나를 특정할 만한 직함을 떠올리지 못했을 때 중립적으로 부를 만한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나의 위치를 규정하지 못하는 데 대한 섭섭함은 있을지라도 듣기에 괴롭진 않다.


그러나 ‘언니’는 가족 중심의 호칭인데 낯선 이에게 언니라고 불리면 어쩐지 내가 독립적이지 않은, 가족 내 구성원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사람 같다.

무엇보다 ‘언니’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떠오르는데, 그 호칭이 다분히 예전의 남성 중심 시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어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내게 효용 되는 언니는 나의 친족 관계인 언니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연배가 어린 여성이다.

그 외에 내가 언니라고 불리는 것은 불쾌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뻘의 노인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계한다. 상담 중에 내담자와의 정서적 유대감으로 인해 혹여나 그에게 무심코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애를 써서 입을 단속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라는 가족 공동체로서 타인도 내 안으로 끌어들여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는 ‘정’의 작용은 이제는 낡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내가 불쾌하다고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불리길 원하는 호칭으로 정정해야 하는 것인가를 두고 나는 고민한다.


나는 말의 의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통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이들은 특별한 의도가 없다. 되레 ’선생님‘이라는 호칭에는 의도가 있다. 당신을 존대하여 부른다는 뜻이므로 부르기 전에 한 템포 쉬어 생각하고 부르는 호칭이다.


그러나 ’언니‘에는 의도가 없다. 내가 여자라서 비하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직업을 낮추는 의도는 더더욱 없다. 그에게 ’언니‘는 그저 습관이고, 일상이다.

시장에 가든, 식당에 가든, 주민센터에 가든 그에게 모든 여성은 연배에 상관없이 모두 ‘언니’이다.

그런 그에게 ‘굳이’ 나는 당신의 언니가 아닙니다,라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오늘은 나의 엄마뻘 되는 사람이 찾아왔다.

스팽글 장식을 좋아하는 나이 든 여성이다. 생활이 평생 가난이었던 그의 인생에서 반짝이고 매끄러운 건 오로지 스팽글뿐인지 모자, 나일론 티셔츠, 길이를 조절하는 스트링이 끝단에 달린 바지에도 온통 스팽글이 달려있었다.


커다란 등산용 배낭을 메고 사무실에 들어와 어정쩡하게 문 옆에 서서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육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웃고 노여워하고 슬퍼한 길이 그녀의 얼굴 곳곳에 깊이 나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2시 약속하신 분이시죠?”

“네, 네.”

“여기 앉으세요.”

“네, 네.”


그녀는 방글거리며 같은 대답을 두 번씩 했다. 배낭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데 그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인지 내려놓을 때 작은 몸이 휘청였다.


“날이 참 덥네요, 그쵸? “

여자는 효도화처럼 보이는 펀칭 꽃무늬 컴포트화를 발끝으로 벗겨내어 맞은편 의자를 자기 앞쪽으로 꺼낸 뒤 다리를 얹었다.

“아이고 다리야. 언니, 물 한 잔만 주세요.” 그녀는 다리를 자근자근 주무르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싱긋 웃었다.

나는 언니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신발을 편하게 벗는 행위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하는 일은 격식과 규정에 몹시 매인 일이므로 사무실의 분위기도 결코 자유롭거나 가볍지 않다. 보통 사무실을 찾는 사람은 복장을 갖추어 입고, 경직된 얼굴로 문을 두드린다.


오늘 온 사람은 그런 공기에 무색하게도 본인의 민낯을 쉽게 드러내었다. 할 일을 위해 왔지만 그 일이 본인의 인생에서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 살아낸 세월의 큰 물결에 휩쓸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듯 일의 공간과는 무관하게 굴었다. 나는 이 의도성 없는 순수한 무례함과 몰상식함의 경계에서 슬픔을 느꼈다.


단지 밥을 목구멍에 넣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한 이 여성의 삶을 나는 쉽게 어림할 수 없지만 현란한 스팽글 장식에도 숨길 수 없는 우중충한 행색과 거무튀튀한 손과 예의와 교양을 배울 겨를이 없었던 그 세월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득해졌다.


“언니, 물 한 잔만 주세요.”

“…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이 여성은 “아, 죄송해요. 제가 버릇이 돼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때와 상황, 상대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달라야 한다는 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렇다.

고행길에 다름없었던 그녀의 지난한 인생에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자신도 미처 다 알아내지 못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평생 아우성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언니라고 부르든, 선생님이라고 부르든 그게 그 인생에서 무슨 무게감이 있겠는가.   


“드디어 올해 빚 다 갚아요. 함바집에서 쎄빠지게 일했는데 20년 족쇄에서 벗어나네요. 내년에 저희 남편이랑 조그만 국수집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내가 언니한테 별 얘기를 다 하네. 아, 언니라고 하지 말랬는데… 미안해요.”


“… 괜찮아요, 선생님. 국수 가게 꼭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그녀가 살아낸 세월 동안 그녀를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대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늘만큼은, 나만큼은 그녀를 존중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에 이제는 작은 빛이 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더 이상 겨우 감당할 만한 삶이 아닌, 기꺼이 살아내는 삶이 그녀 앞에 전개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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