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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Sep 07. 2024

블랙스완

대학을 다닐 때 나는 경기도 변두리에 살았는데 학교는 마포에 있었다. 강의만 듣고 곧장 집으로 와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무렵엔 해가 졌다.

지하철을 타고 수십 개의 역을 거쳐, 또 버스를 타고 시내를 관통해 배밭 앞-저수지-마을회관 같은 정류장을 지나야 우리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그날은 초여름이었고 이른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늦은 오후 강의를 듣고, 중앙도서관에서 두세 시간 아르바이트를 한 뒤 버스에서 내리니 오후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기 전만 해도 가볍게 흩날릴 정도로 내리던 비가 동네에 들어서자 굵은 빗방울이 되어 쏟아졌다.

내가 살던 동네는 날이 어두워지면 인적이 뜸했는데  이날은 날씨가 궂어서 그런지 길에 아무도 없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바람도 세게 불어 발걸음을 재게 놀리는데 아파트 단지 정문이 시야에 들어올 때쯤 도로 한가운데서 어물어물 움직이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나는 겁이 나서 순간 멈칫했지만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걷는 방향과 반대되는 차선 안에 휠체어는 옆으로 넘어져있고, 장애인이 바닥에 엎어져있었다.

“어으으… 도와주세요.“


한눈에 봐도 몸무게가 어림이 돼서 혼자 옮기는 건 무리였다. 차가 오기 전에 이 사람을 도로 밖으로 빨리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맞은편 도로에서 교복 입은 남자 애가 핸드폰을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학생!”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학생!” 부르니 그제야 내 쪽을 보았다.

“학생, 좀 도와주세요.”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면서 학생이 보폭을 넓히며 걸어왔다. 넘어진 사람은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 도로에 쓰러져있었는지 입고 있던 옷이며, 머리며 푹 젖은 상태였고,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허리를 받쳤고, 학생은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잡은 뒤 그를 가까스로 인도로 옮겼다.

“잠깐 이 분 우산 좀 씌워주세요.” 학생은 그에게 우산을 씌우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어리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은 나이여서, 당혹스러운 기색을 들키고 싶지 않아 보였다. 표정의 변화를 막느라 애쓰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119에 전화를 건 지 10분도 안 돼 구급대원이 도착해 그를 앰뷸런스에 태웠다.

“이 깜깜한 밤에 젊은 아가씨가 혼자 용기 있네요. “ 구급대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내게 말하며, 앰뷸런스에 올랐다. 같이 있던 학생은 언제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장애인을 현장에서 도운 건 이날 처음 있었던 일이었고, 나에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싹텄던 순간이었다.

장애인은 약자 그리고 내가 도와야 하는 사람.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은 시각장애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 사람에게 어떠한 배려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가 흰 지팡이를 짚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반듯하게 다림질된 콤비 차림의 모습이었는데 첫인상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게 서류를 건넸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주님 축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내게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축언까지 덧붙였다.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한 상투적인 인사말도 무심히 지나치지 못했다. 그때 내 마음의 결은 윤기가 없고 까슬까슬했으므로 그렇게 지나가는 말도 고맙고, 때론 황송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참 따뜻하시네요.”

그는 보지 못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의 높낮이와 리듬만으로도 내가 웃고 있음을 짐작했으리라.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말은 흐리터분하지 않고 또렷하고, 찬찬해서 사람됨이 진중해 보였다.


면담 후에 그는 내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나는 모처럼 거북하지 않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불편한 몸으로 여기까지 고되게 찾아온 데다 예의를 아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의 불편한 부분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도울 때를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 헤매어 그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았다.

 아마도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그의 언행이나 몸가짐에 더욱 크게 느끼고 마음이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그가 접수한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절차의 필요에 따라 조사를 하다 보니 그가 오랜 시간 가정 폭력을 행해왔던 가해자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가족이 폭력에 순응하며 견디고 살아낸 시간을 생각했다. 그의 맑고 생기 있는 얼굴과 다정한 입매에서 촉발되는 난행을 나는 쉽게 어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 마음엔 어둠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는 나에게 욕을 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지만 내게 다른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인간의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의 잘못임을 곧 알았다. 그 사람은 내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의 도덕적인 언행과 점잖은 몸가짐에서 그를 좋은 사람으로 판단한 것에 앞서 그가 장애인이므로 ‘당연히’ 나쁜 사람이 아닐 것이고, 그는 신체적으로 약자이므로 내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모든 판단이 비롯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었다.


내가 과거에 장애인을 도왔던 경험으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던 것은 아닌지 오늘 만난 사람으로 깨달았다.

장애인은 그저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이지 그것이 성정이나 선악 혹은 강자•약자를 판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마땅히 맞는 말을 나는 새 경험으로 새삼 깨닫고, 인생을 다시 살핀다.

인간은 경험의 포로이고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에 오늘 나는 오랜 시간 생각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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