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몇 차례 봄비가 내리더니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발롱대던 때 나는 돌쟁이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TV 앞에서 서성였다.
정부는 매체를 통해 매일 같이 코로나 감염 환자의 확산세나 감염 경로, 가용 병상 등 코로나 19 발생•대응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하였다.
나는 잡된 것 하나 섞이지 않은 이 순수 무결함의 정수를 어지럽고 사나운 세상에 내어놓은 것만으로도 커다란 죄의식을 느꼈다.
나는 아이를 먹이고 재울 때마다 보드라운 그 애의 엉덩이를 토닥이고 등을 쓸어내리며 고해하였다.
TV에서 매일 오전 같은 시간에 정부 관계자가 나와 코로나 19 정례 브리핑을 할 때 나는 화면과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에 이 땅에 기회나 희망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 사뭇 자신하지 못한 때라 빈번히 절망하고, 어차피 세상은 인간에 의해 끝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 앞에서 주저앉기 일쑤였다. 무신론자가 아님에도 엉터리 종말론이 곧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올 만큼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우연히 발견한 희망은 경이롭다. 뜻하지 않은 희망과 기대에는 마음이 움직인다. 쉬이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는 깊은 숲 속의 어스름한 새벽녘, 어느 틈에 나무 사이로 파고든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은 내게 와서 닿았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날 코로나 상황을 브리핑하는 정부 관계자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수어통역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정부 인사와 대등한 자리에 서서 코로나 브리핑을 수어로 통역하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안에서 솟는 뜨거운 희망으로 마음이 물컹해졌다.
내일 일도 어림할 수 없는 뒤죽박죽 무질서한 상황에서 장애인이든 비장애인(농인은 비장애인 대신 듣는 이, 청인이라는 단어를 씀)이든 모두를 이 긴급한 정보의 접근권에서 결코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와 행동으로의 발현이 내게는 새로웠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장애인의 ‘다름’을 신체적인 차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메시지로 나는 받아들였다. 이 기호는 아름다웠고, 소리 없는 손짓이 의미하는 언어에 인간의 품위가 느껴졌다.
결국 사람이 희망이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눈물이 났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던 때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정말 수어 통역을 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tv를 틀어놓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마음에 진심이었다.
나의 외삼촌은 청각장애인이다. 내가 수어를 하지 못하고, 외삼촌은 말을 하지 못하므로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없다. 짧은 대화는 주로 필담으로 나눈다.
‘남편은 어디 회사 사장님?‘
‘사장님 아니에요. 회사원이에요.’
삼촌이 배가 나온 남편의 모습을 보고 ‘사장님’으로 어림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대화를 짧게 나누고는 서로 싱겁게 웃고 말았다.
나는 외삼촌과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 외가에 머물렀던 때 벌에 쏘이고 개울가에 머리가 처박혔던 나의 어릴 때를 묻고 싶고,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그에게 봄에는 어느 산, 어느 코스가 가장 좋은지 묻고 싶고, 이 잘생긴 얼굴에 왜 아직 여자친구는 없는지 농도 걸고 싶다.
그러나 나는 말문이 열리기도 전에 입을 닫고는 그냥 웃고 만다. 삼촌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속상할까 봐 걱정되고, 나는 그의 필담을 선뜻 이해 못 할까 봐 두려워서다. 가족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조차 언어의 장벽이 있다는 건 애달픈 일이다.
애가 닳도록 슬픈 상황도 자주 겪어 일상이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게 문제다. 대학을 다닐 때 수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수어는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했다. 음성 언어에 익숙한 나로서는 수화언어는 마치 다른 세계를 건너는 것처럼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때 내게 청각장애인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수어를 열심히 배웠을 텐데 쓸모의 기회가 1년에 한두 번 보는 가족에게 한정되니 힘써 배울 각오나 의지가 굳지 않았다.
오늘 농아인(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소리 없는 손짓으로 대화하며, 서류를 순서대로 작성했다.
둘 사이에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몹시 아쉬웠다. 내가 스무 살 때 수어통역을 배워뒀다면 지금 나도 함께 대화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미련이 마음에 끈덕지게 남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과 눈썹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외치고, 주장하고, 때로는 화를 내었다. 농아인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두 번 치기도 했다.
수어통역사의 입을 통해서 나는 그의 서류 작성과 접수를 도왔다. 농아인이 서류를 미리 작성해 오긴 했지만 답변을 연필로 흘려 쓴 데다 문장의 구성이 어딘가 이상해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우리말로 쓰긴 했는데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일반 어순이 아니고, 조사가 없었다. 우리말을 되려 영어식으로 변형한 것에 가까워 어감에 기대야 하는 문장이 많았다.
예를 들어 ‘예쁜 꽃’을 ‘꽃 예뻐’라고 쓰는 식이다. 통역사에게 내가 이해 못 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묻자 그는, 농아인은 한국인이므로 우리나라 문화는 공유하지만 언어는 별개라고 했다. 수어는 수어로 인식하고, 우리말은 마치 외국어처럼 학습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역사에게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그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게 통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일상과 세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 헤집고 다니지 않는 한 그가 살아온 시간을 ‘언어‘와 ‘기호’로 더는 알아내기 어려웠다. 이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가 청인(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비장애인)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을진대, 글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서류 공백의 선명한 백색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게 다인가요? 더 자세히 여쭤봐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농아인이 속에 품고 있는 뜻이 서류에 작성한 글과 맞닿은 것인지 재차 수어통역사에게 묻고, 다시 요청했다.
“이게 최선이에요. 여러 번 여쭤봤는데 같은 말씀만 반복하시네요.”
나는 답답한 느낌에 마음이 개운치 않았지만 두 사람의 언어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하니 더는 어쩔 수 없었다.
농아인도, 수어통역사도 그리고 나도 찜찜한 얼굴을 하고서 서로 인사를 건네고는 헤어졌다.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거나 통상적으로 해왔던 일을 단지 언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손짓으로, 눈빛과 입술의 움직임 그리고 몸짓으로 더 맹렬히 소통했다면 그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실에 더욱 가깝게 구현해내지 않았을까 하고 지나온 시간을 살펴보았다.
맥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했던 내가 한없이 무력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괴로웠다.
내가 수어를 외국어처럼 익혀두었다면, 그가 익숙하다는 듯 자신의 장애를 탓하며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가 사는 세계의 언어를 모르는 채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건, 닫힌 세계의 문 앞에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는 기복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무력감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서서 한참을 허둥댔다.
무력감이 마음을 지배할 때는 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