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은 어른이 되면 영영 잃는 것인가?
시간 위에 경험이 켜켜이 쌓이고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벌어진 상상의 틈은 현실이 메우고; 내 안의 어린이는 어른이 된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 결국 헤어지고 만다.
동심은 내가 삶을 밀고 나갈 때 내 안에 단단히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그것을 무심결에, 무자비하게 부수는 적이 있다. 바로 어른이다.
동심 파괴의 주범은 어른이 된 현재의 나와 내가 어릴 때 주위에 있던 어른이다. 어쨌든 두 지점의 어른이 동심을 파괴하는 범인이다!
90년대만 해도 스승의 날에는 반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으레 카네이션과 선물을 주었다.
매해 교정 앞뜰의 목련 나무에서 하얀 꽃봉오리가 솟아오를 무렵이면, 나는 선생님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속으로 애를 태웠는데 그 시간이 무척 즐거운 고통이었다.
나는 선물의 쓸 만한 가치에 의미를 두고 고루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데 골몰하였다.
초등학생의 코 묻은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는 선물이야 뻔하지만 그것이 사과 한 알이 되었든, 얇은 책 한 권이 되었든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믿었다. 어린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사랑의 표증으로 건넨 선물이니 어른의 눈에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라도 마음만큼은 결코 작게 받지 않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열 살 때 나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동그란 통에 든 목캔디를 스승의 날 선물로 골랐다.
작은 카드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같은 문장 몇 줄을 적어 목캔디와 함께 그에게 건넬 때 나는 조바심으로 마음이 떨렸다.
선생님의 목 관리까지 헤아리는 제자라니, 나의 선물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을지 궁금해서 몸이 달았다. 나는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그를 들볶아 당장 알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고맙다, 하고 받아 든 사탕용기를 교탁에 탁 내려놓고는 시선을 곧바로 거두는 그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보고 나는 흐릿하게나마 그의 마음을 알아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애써 부정했다.
선생님이 나를 편애한다는 사실을 다른 애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감동한 마음을 차마 표현하지 못했으리라 넘겨짚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이후 선생님에게 더 이상 따로 불리지 않는 ‘희미한’ 아이가 되었다.
당시 선생님이 총애하는 아이는 그의 사사로운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그는 제가 선택한 아이에게 수업 시간에 은행에 다녀오라든가, 교무실에 있는 자기 책상에서 서류를 들고 오라든가, 방과 후 남아서 시험 채점을 도와달라든가 하는 일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것이 그가 제자를 편애하는 기준이었다. 나는 새 학기부터 ‘그날’ 전날까지(단 3개월) 그가 믿고 아끼는 학생이었다.
그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는 반에서 나 하나였다. 요즘이라면 아동 학대 신고감이지만 그때 나는 그의 사사로운 심부름꾼으로서 우쭐댔고, 내가 그의 유일한 ‘선민’이라는 의식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데 5월 15일 이후 나는 그 ‘영광의’ 자리에서 무참히 쫓겨났다:
교탁에 놓인 책과 책장 사이에 낀 흰 봉투.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선생님은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나의 뒤를 이어 그의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었다.
나의 동심은... 버스러졌다.
일을 하다 보면 손님이 선물을 들고 올 때가 종종 있다. 케이크, 커피, 과일 같은 먹을 것이 주된 것이고, 핸드크림, 향초 같은 생활용품도 있고, 주유권이나 백화점 상품권을 건네는 사람도 있다. 몇 해 전 손님에게 포도 몇 송이를 넙죽 받았다가 상사에게 된통 야단을 맞은 후로 먹을 것도 안 받는 게 근무 중 철칙이 되었다.
뇌물의 기준은 대가성이다. 돈이든 현물이든 주는 이가 받는 이에게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고자 건네는 것은 명백히 뇌물이라고 본다. 그런데 피차 이득 볼 게 없는 사이에서 오가는 선물에 대가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
사실 내게는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라 공허하다. 나는 아랫사람이라 판단할 필요가 없다. 윗선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오늘 뜻밖의 손님이 사무실 문틈으로 얼굴을 비죽 내밀었다. 이이가 청구한 업무는 작년에 이미 종료되어 다시 볼일이 없는 사람이다.
주연은 아니지만 인기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던 배우라 얼굴을 보자마자 기억이 났다.
“어?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
“이 근처에서 촬영하는데 선생님 생각이 나서 들렀어요. 작년에 일을 잘 처리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 “
그녀는 팩에 든 과일 주스와 호박떡을 건네며 말했다.
“아... 감사한데 저 이거 받으면 안 돼요. 윗분한테 혼나요.”
내가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멋쩍게 웃자 그녀는 그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아이고 이거 저희 집 앞마당에서 딴 살구로 제가 직접 아침에 간 주스고요, 요 떡은 저희 어머니가 보내주신 거예요. 저희 집 떡집하거든요. 제가 돈 쓴 거 하나 없어요. 스텝들하고 배우들한테도 다 나눠준 걸요.”
아이를 부드럽게 타이르는 엄마처럼 그녀는 괜찮다고, 아무 문제없노라며 나의 마음을 토닥여주었다.
위에서 포도 한 송이도 받지 말라고 했는데 안 받자니 상대의 손이 몹시 부끄러울 것 같고, 받자니 애먼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을 졸이던 차에 출근길에 산 에끌레어가 생각났다.
“아! 이거 몇 개 안 되는데 가져가서 드세요.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케이크집인데 다들 맛있다고 해서 샀거든요.”
나는 큼직한 에끌레어 3개가 담긴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말하자면 물물교환이니까 제가 받는 건 명백히 뇌물 아닙니다!”
나의 모자란 생각에 뭐라도 서로 주고받으면 대가성이 아니니 뒤탈이 나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녀는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내 의도를 알아채고는 웃으며 과자를 받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일 할 때는 달달한 것만큼 위로가 되는 게 없더라고요.”
에끌레어가 담긴 종이봉투를 열어 향을 맡는 그의 입가에 싱그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나는 오늘 열 살 때 선생님에게 건넸던 목캔디가 생각났다. 그가 바란 건 마음으로 건네는 순진한 사랑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가외의 대가이자 몫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건 분명 뇌물이다.
살구주스와 호빅떡은 아니다.
서로에게 아무 바람이 없는 따뜻한 정이고 마음이다. 모호했던 뇌물과 정의 경계가 오늘은 뚜렷하다.
그녀는 내게 살구주스와 호박떡을 주었고, 나는 그녀에게 에끌레어를 주었으니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마음을 주고받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