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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Nov 27. 2024

1995년 (1)

이지애

“이지애?”

지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내 앞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이름부터 확인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리와 어깨선에 군살이 붙고, 매끈했던 턱선은 조금 모호해졌지만 지애가 분명했다. 앞니 두 개가 토끼 이빨처럼 나와있고, 말할 때 왼 볼 아래에 작은 볼우물이 생기는 귀염성 있는 인상. 입술 오른쪽 산봉우리에 불뚝하게 튀어나온 하트 모양 점까지, 변하지 않을 만한 건 다 그대로였다.


그녀는 핸드폰에 뜬 바코드로 결제를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애는 나를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잠시만, 내가 맞출게, 하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뿔테 안경을 콧잔등에서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1학년 4반, 찡어 너구나? 와, 얼마만이지?"


우리는 스타벅스 창가에 붙여놓은 바 테이블에 앉아 20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는 굵직한 제 인생의 굵은 가지를 펼쳐놓고, 어제오늘의 사소한 안부를 물었다. 지애는 그냥저냥 보통의 삶을 살고 있노라고 했지만 그렇게 별 굴곡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선택받은 사람들의 것인지 잘 아는 나로서는 그녀가 여전히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있음을 어림했다.

지애는 미대를 나와 입시 미술학원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며 한 번씩 대학 동문들과 작품 전시회를 연다고 했다.


“넌 어때?”

‘지애야. 나는 이루어놓은 게 하나도 없어. 기차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엉뚱한 역에 내린 기분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오후를 공연히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비슷해. 월급쟁이 10년 차. 결혼했고, 여섯 살 남자아이 하나 있고. 평일엔 허둥지둥. 주말만 기다린다.”


우리는 어제도 만난 사이처럼 이 백화점 9층 식당가 인도 카레가 꽤 먹을 만하다든가, 독감 백신은 비싸도 4가를 맞아야 한다든가, 지나가는 어린 여자가 입은 품이 넉넉한 청바지를 보고는 유행은 돌고 돈다든가 하는 일상의 말들을 주고받았다.


지애는 열넷 일 때도 말이 많았다. 타고난 기운이 싱싱하고, 마음 안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제 자신을 검열하지 않는 아이라서 마냥 밝고 순진했다. 그래서 나는 지애를 좋아했다.


그때의 지애는 자기 엄마가 밥물을 못 맞춰 만날 진밥 먹는 게 고역이고, 제 생일에 아빠가 당신이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를 사 와서 몇 날 며칠을 단식투쟁 중이라든가 하는 식의 철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에 진 그늘에 빛이 들었다.

사소한 투정도 받아줄 만한 여유 있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아이들만이 부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지애와 함께 있으면 나 역시 애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이상하지. 며칠 전에 전주로 연수를 갔다가 잡풀로 뒤덮인 철로를 내려다보고 문득 네 생각을 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만난다."


내 말에 지애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 입시라는 기나 긴 여정의 출발선에 선 기분이 들었고,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채 허둥댔다. 매일 짜여있는 학교 시간표와 매일 만나는 같은 사람들. 집과 학교를 오가는 반복된 삶이 영원할 것만 같은 생각에 숨이 막혔다.


과목마다 바뀌어 들어오는 교사들이 ‘지금 성적이 결국 대학을 결정한다.’, ‘허리 펴고 똑바로 앉아. 입 다물어.’, ‘17번, 27번 앞으로 나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린 작은 일탈을 꿈꿨다. 어른들에게 매 맞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문젯거리를 찾아다녔다.


6월, 여름의 길목에 선 것 치고는 얼굴에 쏟아지는 볕이 따갑게 느껴지는 정오였다. 지애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어른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에 교문 밖으로 나갔다. 일탈이라고 해봤자 쭈쭈바를 입에 물고 운동장 그네에 앉아있다가 오거나 문구점에 들러 하이테크 펜을 전지에 끄적여보다 돌아오는 것뿐이지만 그런 작은 탈출구가 우리의 일상에 차가운 숨을 불어넣었다.


그날 우리는 소다맛 쭈쭈바를 입에 물고 교문 앞을 지나는 철로 위에서 양팔을 펼쳐 균형을 잡으며 더듬더듬 걸었다.

“지애야, 늦기 전에 들어가자. 오늘 담임한테 걸리면 맞을 거 같아."

지애는 대답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애가 물고 있던 쭈쭈바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지애는 슬리퍼를 신은 왼발을 철로 틈 새에서 빼내려고 팔을 허우적거리고 허리를 비틀었다.

“발 꼈어?"

“왜 안 빠지지?"


그때 멀리서 화물열차의 높고 웅장한 기적 소리가 울렸다. 기차 지붕 위 굴뚝이 토해내는 검은색 구름이 파란 하늘에 흩어졌다. 두어 번의 기적 소리가 더 울렸다. 점점 커지는 열차 바퀴 소리가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야! 쓰레빠는 포기하라고.”

“씨. 발이 아예 안 빠진다고!”

나는 지애의 손을 잡고 있는 힘껏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애 발이 틈에 어떻게 꼈는지 슬리퍼를 벗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잡은 두 손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하얗게, 퍼렇게 물들어갔다.

지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그 애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둘 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지애는 돌바닥에 널브러진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애 뒤에는 한 남자가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양손을 제 무릎에 두고 헐떡였다. 뒤에 맨 책가방이 머리 위로 쏠려 쏟아질 것 같았다.


열차는 지애가 발이 낀 자리의 30cm여를 앞두고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열차의 ‘코’도 쓰다듬을 수 있는 거리였다. 기관실 문을 열고 나온 기관사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결사적으로 난간을 붙잡고 서있었다. 그의 양다리가 가오리연 꼬리처럼 나풀거렸다. 지애의 눈 흰자가 뒤로 넘어갔다. 나와 책가방을 맨 남자가 그 애의 뺨을 치고 어깨를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봐.” 남자의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반향 되는 소리처럼 웅웅 낮게 울렸다.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남자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굴까, 분명 아는 사람인데 생각하며.


“너 괜찮아? 지금 뛰어가서 담임 불러와. 할 수 있지?”


남자는 푸들푸들 떨리는 내 한쪽 어깨를 붙잡고 정신 차리라며, 지금 곧장 학교로 갈 수 있겠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크게 숨을 후 내뱉고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나 슬리퍼를 끌며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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