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크리스마스, 가가호호 전파사 아저씨!
1997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큰 회사가 맥없이 쓰러지더니 연말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리나라도 곧 미국이나 일본처럼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는 대단한 자부심과 기대감에 흥분했던 때라 급작스러운 IMF 사태는 많은 이들을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터지기 직전까지 숨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마음에 희망을 가득 채워 넣은 사람들이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다가 무언가에 등 떠밀려 내려선 곳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구렁텅이가 발아래에 놓여있었다.
기름값이 700원에서 2000원으로 오르고, 군입대를 원하는 청년들이 폭증해 1년씩 대기를 하고, 빚독촉에 시달린 가족이 야반도주하여 무단결석을 하는 아이가 생기고… 친구들 부모님이나 친인척, 회사 동료가 스스로 삶을 끊어내는 이야기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듣는 때였다. 하루아침에 출가하겠다며 민머리로 등교한 아이가 우리 반에도 있었다.
그해의 모든 불운과 불행의 짙은 그림자는 그다음 해에도 기다란 꼬리를 남겼다. 그때 내가 본 세상은 잿빛이었다. 노상에서 작게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바닥을 훑어내는 칼바람 소리, 취객의 악 쓰는 소리에 묻혔다.
길에서 별 목적 없이 걷는 듯한 사람들의 어깨는 휘어진 옷걸이처럼 아래로 늘어져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없거나 불안해 보였다. 종종 과장하여 웃고 떠드는 사람은 알코올의 마력에 잠시 빠져든 것일 뿐 진짜가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이 빠져든 생각 끝에 제 인생엔 삶과 죽음 두 가지 선택뿐이라고 자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1998년이 되던 해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새로 솟아난 여드름이나 콧구멍 아래로 슬며시 삐져나온 코털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가도 어느새 서로 간의 ‘불행‘을 배틀처럼 링 위에 올리는 때가 오면 침묵이라는 불청객을 다시 맞아들이곤 했다.
당시 미국산 책가방 브랜드 라벨 위에 태극기를 꿰매어 다니는 게 유행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태극기를 붙이기 위해 미제 가방을 더 많이 구매한 셈이지만 그때처럼 태극기가 쿨해보였을 때가 없었다. 열일곱 아이들에게는 애국보다야 유행에 좀 더 마음을 두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거리에서 태극기를 물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속에 뜨거운 일렁임이 일곤 했다.
학생이던 우리에게도 그때의 화두는 역시 ‘돈’이었다. 나라 곳간이 비었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니 우리도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돈을 버는 일이 애국의 자세이자 우리의 쓸모를 인정받는 길인가, 생각했던 때였다. 돈을 버는 어른의 세계가 궁금하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남의 돈’의 매혹에 빠져들고 싶은 게 진짜 속마음이었겠지만.
당시 함께 어울리던 친구 몇 명과 나는 미성년인 우리가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기 위해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댔다. 등굣길에 교차로 같은 무가지를 들고 와서 롯데리아 알바, 군고구마 장사, 고깃집 불판 닦이, 붕어빵 장사 등을 찾아보았지만 그 일을 하기에 다만 얼마라도 초기 자본이 필요하거나 시간상 제약이 있거나 미성년자가 하기엔 어둠의 세계와 맞닥뜨릴 위험이 있거나 해서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흩어졌다.
비밀스러운 고등학생의 용돈벌이 생각에 빠져든 어느 밤, 나는 창문 너머로 들리는 고유의 리듬과 구성진 멜로디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 찹싸아아알떠억, 메미이이일무 욱!
야트막한 초가집 싸리문(사립문)을 드나들었던 방물장수가 활동했던 때 같은 길을 오갔을 법한 찹쌀떡 장수가 무려 1998년에도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애들에게 찹쌀떡을 팔아보자고 말했다. 서로 얼마간 용돈을 모으면 떡 한 판 정도는 살 수 있었고, 위험해 보이거나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내 의견에 별다른 이의를 다는 친구는 없었다. 우리는 한두 시간만 투자하면 하룻밤 새에 몇 만 원을 손에 쥐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부모님이 떡집을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30개들이 한 판을 도매가로 사서 30% 이윤을 붙여 시내에서 팔기로 했다.
하교 후에 시내에 나가서 내가 떡판을 들고 친구 둘이 내 양 옆에 서서 영업을 시작했다.
아마추어 가수들이 종종 버스킹을 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셋이 입을 맞추어 소리쳤다.
- 찹쌀떡 사세요. 쫄깃하고 맛있는 찹쌀떡 사세요.
외투도 없이 가벼운 교복만 걸친 학생들을 가엽게 볼 어른들이 곧 줄 서서 떡을 사갈 것이란 예측은 반 시간 만에 빗나갔다.
시내를 오가는 사람들은 오로지 목적지인 집만을 염두에 둔 것처럼 고개를 아래로 잔뜩 숙인 채 바삐 지나갔다.
- 야, 우리 하나밖에 못 팔았어. 한 시간도 넘었는데. 발 시려 죽겠다.
- 3 등분해서 집에 가서 엄마 아빠한테 사달라고 하자. 손발에 감각이 없어.”
옆에 선 애들이 손을 모아 입김을 후후 불어넣고 발을 종종 거리며 내게 집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난 오랜 세월에도 살아남은 찹쌀떡 장수의 엄연한 현존을 기억하며, 영업 방식을 바꿔보자고 했다.
불 켜진 가게에 들어가 면대면, 적극적으로 팔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가게의 투명 유리문에 나란히 얼굴을 붙이고 서서 손차양을 만들어 가게 주인의 인상을 꼼꼼히 살폈다. 무표정에도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있거나 입매가 고집스러워 보이거나 팔짱을 낀 채로 가게 안을 분주히 오가는 주인이 머무는 가게는 통과.
오로지 선한 눈망울과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밝은 기운이 몸에 깃들어 있는 듯한 주인을 타깃으로 삼았다.
나의 영업 전략은 초기에 성공적인 듯 보였다. 가게 몇 곳에서 서너 개의 찹쌀떡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흔쾌히, 혹은 연민의 마음으로 찹쌀떡을 사주었다. 그러나 곧 미안하다며 정중히 거절하거나 쫓아내다시피 밖으로 내모는 가게 주인들을 연이어 만나게 되자 우리의 희망은 다시 꺾여버렸다.
- 저기 가가호호 전파사 한 군데만 가보고 안되면 그냥 들어가자. 안 팔린 건 내가 가져갈게.
내 마지막 제안이 내키지 않는 듯, 애들은 터덜터덜 걸어 내 뒤를 따라왔다.
가가호호 전파사 주인은 안경을 콧잔등 밑으로 내리고 반으로 접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은발이 성성한 초로의 가게 주인은 밑으로 처진 안경을 손가락으로 튕겨 올리며 우리 셋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손에 든 직사각형의 떡판에 시선을 둔 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니들 그거 다 팔면 얼마야?
- 이거 다 해서 만 오천 원에 드릴게요. 아저씨.
나는 거의 울다시피 애원하고 있었다. 다 팔면 얼마냐고 묻는 건 다 사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전파사 주인은 어른의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말을.
- 만 오천 원 벌려고 이 추운데 그걸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냐? 아이고. 그거 다 줘. 여기 내려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가게 주인이 바지 주머니를 뒤져 찾은 만 원짜리 두 장을 얼렁뚱땅 받았다.
- 아저씨, 죄송한데요. 저희 잔돈이 오천 원이 안 되는데요.
우리는 그동안 찹쌀떡을 판 돈이 채 오천 원이 안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게 주인이 마음을 바꿀까 봐 조바심을 느꼈다.
- 됐고. 니들 오늘 인생 공부 좀 했지? 돈 버는 게 녹록하더냐?
우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작게 저었다. 한 친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를 훌쩍였다. 가게 주인은 난로 위에 얹어놓은 주전자를 기울여 우리에게 결명자차를 따라주었다.
- 마침 손님도 없고 일찍 문 닫고 집에 들어갈까 하는데, 너희들 집이 어디야?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 괜찮아요, 아저씨.라고 대답하는데 옆에 선 친구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집에 가려면 배차 간격이 한 시간인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애였다.
우리 셋은 가가호호 전파사 가게 주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게 주인은 p시에 사는 친구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거의 30년 전의 일이라고 해서 지금보다 인심이 더 나았던 때가 아니다. 운이 좋은 일부를 제외하고, 많은 이들의 삶에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어둠을 짙게 드리웠던 때였다.
처음 본 이에게 선뜻 내어준 그의 다정한 마음과 연민, 진정한 어른의 여유를 잊지 않으며,
나보다 인생을 덜 살아낸 이들에게도 내가 받은 마음을 용기내어 전해줄 수 있기를, 그런 기회를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기를.
1998년 가가호호 전파사를 운영했던 주인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