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01년 (2)

두 번의 수능, 포기하는 용기

by ondo

내가 선택한 학교는 아직 졸업생이 배출되지 않은, 개교한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사회복지 특성화 대학교였다. 학과는 3개, 입학생은 백 명 남짓. 당시 두 발 딛고 서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표였던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되도록 멀리 가고 싶었다. 멀고도 깊숙한 곳.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해도 우연히, 자연스럽게 들를 수는 없는 곳. ‘근처 왔다가 네 생각나서 연락했어. 잠깐 볼까?’라고 말할 수 없는 호그와트 같은 곳, 나는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곳을 찾았다.


그땐 집안 가구나 벽지, 마루 바닥에도 비난과 흐느낌, 냉기, 가난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붙박이들이 비정한 언어와 폭력이 되어 나의 심장을 조이고 숨구멍을 짓눌렀다. 어서 이곳에서 비켜나 깨끗하고 새하얀 벽지를 바른 나만의 집을 내 안에 짓고 싶었다.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나만의 집을.

눈송이를 모아 꾹꾹 뭉치듯, 시간을 단단히 뭉치고 압축해 빨리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내 인생에도 다음 장이 있다면.


학교는 숲 속 비밀스러운 요새 같은 곳에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 없었고,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스쿨버스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지역 주민조차 근방에 학교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숨어버리기에 적합한 곳을 찾은 데 나는 만족했다.


나는 입학하기 며칠 전에 아빠 차를 타고 학교 기숙사에 입소했다.

부모님이 새로 난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 넣은 내 여행 가방을 기숙사 앞에 내려놓으며, 학내 세 동 뿐인 건물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황당하고 한편 단념한 눈으로. 등 떠밀려 차에 오르는 두 사람은 미심쩍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며 눈빛으로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내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모른 체하고 돌아섰다.


기숙사 건물은 정남향으로 들어앉아 있어서 볕이 잘 들었다. 들창을 쬐는 부드러운 햇살이 깨끗한 크림색 벽과 원목 가구를 비추었다. 방 안이 안온하게 밝고 따뜻했다. 먼저 온 선배 둘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우린 ‘성인답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했다.


방장인 3학년 선배가 신입들을 데리고 다니며 기숙사 내부를 소개해주었고, 통금 시간, 자잘한 규칙들을 알려주었다.

갓 태동한 학교, 신입생, 새 건물, 생경한 지역, 새로운 사람들.

모든 환경이 새뜻한 바람이 되어 그늘진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나는 날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고 떠들었다. 거실에 모여 tv 드라마를 보면서 여자 배우의 섬세한 아이라인을 보고 감탄하거나 소등 후 촛불을 켜놓고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울고 웃었다.


나는 이제야 내 나이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아홉 다운 내 얼굴, 내 표정, 산뜻한 몸과 마음. 거울을 볼 때마다 마음의 기쁨으로 빚어낸 얼굴의 빛이 속에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생각보다 더 행복해져서 여기에 온 이유를 금세 잊어버렸다.


신입생 OT를 며칠 앞두고 눈이 많이 내렸다. 3월에 내리는 눈이었다. 나는 필요한 물건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고속도로 나들목 인근 주유소 옆 공터에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지나가던 승용차 한 대가 후진을 해서 내 옆에 차를 세웠다. 우리 과는 아니지만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교수였다.

“우리 학교 학생이에요? 눈 오는데 타요. 어차피 나도 학교 가는 중이니까.”


나는 예의를 차리느라 잠시 망설였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학교 버스를 기다리느니 잠시 난처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그의 차에 올라탔다.


교수는 신입생인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듯했다. ‘대체’ 이 학교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굳이' 왜 이 학교에 지원했는지, 그의 궁금증은 주로 '왜'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교수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으로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꾸민 말을 뻔지르르하게 떠들었다. 나는 그가 묻지도 않은 말에 거짓말을 보태고 더해서 학교 측 관계자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할 말을 골라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유익하고 선한 말’이 끊이지도 않고 술술 나왔다.

아마 누구라도 톡 건드리면 나올 수 있게 나름의 지원 동기를 준비해 놓았던 모양이다. 내가 나를 설득하기 위한 방어 기제였을까?


교수는 내 말에 감동한 눈치였다. 그는 운전을 하다가 한 번씩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오오’ 소리를 내고 생각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신입생 OT에서 진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전체 학부생과 교수와 학교 관계자들이 모인 대학 강당에서.





keyword
ondo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프로필
구독자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