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소년
계란으로 치자면 인생 대부분을 흰자 가장자리, 경기도 끄트머리에서 살던 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인생 처음으로 노른자땅인 서울, 서울, 서울'특별'시에 입성했다.
나는 한강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장으로부터 '한수이북의 명문 ㅇㅇㅇ여고!'라는 구호를 운동장에서 서서 전체 조회시간마다 들어야 했다.
한강을 보려면 우리가 사는 데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족히 2시간은 나가야 하는데, '명문'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을 여기서 한강으로 잡는다니.
말하는 사람은 어땠을지 몰라도 당시 듣는 내 입장에선 좀 머쓱했다. '한수이남의 명문'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대학에 가니 말로만 듣던 '한수이북'의 '한수', 한강이 지척이었다. 한강은 학교에서 맥주와 안주가 잔뜩 든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건들건들 걸어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는 한강권역이 내 활동 반경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고,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기느라 애를 썼다. 촌사람이지만 촌사람이라서 촌티 나는 게 싫었다.
한동안 한강의 마법에 빠져 매일 왕복 4시간을 오갔다. 한수이북에서 한강까지. 지치는 줄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과제를 하고, 음악을 듣고, 술에 취해 타인의 어깨를 왼쪽, 오른쪽 ‘핑퐁핑퐁‘ 빌려가며 집과 학교를 오갔다.
나는 학교가 너무나 좋은 나머지 수업이 없는 날이나 심지어 주말에도 학교엘 갔다. 일주일 내내 학교 방송국(나는 대학방송국 신입 아나운서가 되었다!)에서 음악을 듣거나 과방 소파에서 책을 읽거나 동기,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나다녔다.
대학 생활이 이렇게 재밌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열여덟, 열아홉의 나에게 '조금만 버텨. 빛이 보여.'라고 말해주었을 텐데. 우울감에 젖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내 얼굴을 잃었던 그때의 내가 가엽고… 애틋했다.
달라진 '노는 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무렵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녀는 여름방학 때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이제 '합법적'으로 성인이고, 마침 아르바이트로 과외도 하고 있어서 모은 돈도 조금 있으니 안 될 이유가 없었다. 1년 사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한강, 대학, 생맥주, 제주도, 여행, 어른, 자유.
어느 하나 빛나지 않는 말이 없던 그때. 우리는 배낭을 메고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 출신 학과 동기가 민박을 하는 친척에게 부탁해 우리가 2박 3일 묵을 곳을 알아봐 주었다.
6월의 제주는 눈이 부셨다.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하늘, 하얗게 빛나는 등대와 빨간 목마. 오가는 데를 종잡을 수 없는 바람 소리마저 길벗의 휘파람 소리로 들렸다. 당시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이호테우 해변 등대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바람 탓만 할 수 있을까? 눈이 부셔도 눈물이 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이었다.
첫날엔 흑돼지를 구워 먹고, 재래시장에 가서 오분자기를 한 뚝배기 먹고, 바다에서 사진을 찍고 놀았다. 다음 날 아침에 친구가 눈을 뜨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보자고 했다. 뭐든 좋았다. 무작정 걷자고 해도 좋을 일이었다. 우리는 동네 자전거 대여점에 들러 자전거를 빌렸다. 앞에 바구니가 달린 동네 마실용 자전거였다. 친구가 관광 지도를 펼쳐 손가락을 5cm 길이만큼 벌려 딱 이만큼만 가보자고 했다. 어려울 게 없어 보였다. 지도는 평평하니까.
우린 생수 하나씩을 사서 배낭 옆구리에 집어넣고, 자전거로 달리기 시작했다. 난 출발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깨달았다. 제주는 섬이다. 화산 활동으로 바닷속에서 융기한 땅. 계획도시처럼 판판한 땅이 아니라는 것. 기분상 끝없이 오르막만 이어졌다. 우린 어느새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 자전거도 끌고 몸도 끌고서 해안도로를 비척비척 걸어갔다. 발이 걷자 하니 몸이 따라가 주었다.
속으로는 ‘당장 택시를 불러야 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친구에게 먼저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전거에 오르내리며 가던 중에 내 자전거 체인이 털렁거리더니 빠지면서 페달이 제대로 밟히지 않고 바퀴가 헛돌았다. 나는 갓길에 자전거를 세워 검은 기름때가 잔뜩 묻은 체인을 집어 들고 끼워 맞춰 보려고 해 봤지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만 추정할 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택시를 부르든, 대학 동기를 부르든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이 자전거를 차에 싣고 갈 일을 부탁하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키가 껑충한 소년이 브레이크를 급히 잡더니 길을 건너 우리에게 다가왔다. 연한 살구빛 볼에 솜털이 아직 보송보송했지만 코밑엔 거뭇거뭇 연필로 그린듯한 수염이 비쳤다.
"뭐가 고장 났어요?"
체인이 빠졌다고 하자 소년이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땅에 댄 채 자전거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제가 끼울 수는 있는데 또 빠질 거예요. 어디까지 가셔야 되는데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도두동이요."라고 말했다. 내심 친구도 숙소에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모자나 선글라스, 팔토시도 없이 자전거를 타기에 그날 제주의 날씨는 정말 본연의 여름이었다.
그 아이는 제 손이 더러워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체인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집중했다. 해사하고 맑았던 얼굴이 점차 붉게 짙어지고, 짧은 구레나룻 틈에서 땀이 흘렀다.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에서 20분이 지나자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그 애 곁을 부산스럽게 서성였다.
"저희 택시 부르면 돼요. 그만해요. 너무 미안해서 안 되겠어요."
그 아이는 기름 묻은 손을 청바지에 쓱쓱 문지르더니 씩 웃었다.
"다 됐어요. 고쳐는 놨는데 여기 지나도 계속 오르막이라서 또 빠질 거예요. 어... 저희 아빠 시간 괜찮으신지 여쭤볼게요. 잠시만요."
우린 괜찮다고 손을 저었지만 적극적으로 거절하진 않았다.
여행자라서, 이제 막 스무 살이어서, 제주도는 처음이라서 모든 상황이 낭만으로 치환되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픽업트럭을 몰고 와서 우리의 자전거를 짐칸에 실어주었고, 도두동까지 데려다주었다.
"근데 학생이죠? 몇 살이에요?"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소년에게 물었다.
나는 창피하지만 내심 그 아이에게 조금 반했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용기와 자신감, 어른들 사이에서 쭈뼛되지 않는 자연스럽고 세련된 매너, 무엇보다 낯선 여행자에게조차 쉽게 내어주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
"열세 살이요."
"네? 그럼 초등학생이에요?"
"네."
"키가 진짜… 크네요."
나는 얼굴이 화끈해져서 고맙단 인사를 뒤통수에 매단 채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친구는 벌게진 내 얼굴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아직도 특별히 제주도가 좋다. 고향도 아니고, 연고지도 아닌데 제주도에 가면 일상의 시름이 걷히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때 만난 소년의 얼굴이 제주의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이 여태 바뀌지 않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