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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독일에서 만난 천사

by ondo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수강할 때 어느 교수의 말 때문에 과 동기들이 동요한 적이 있다.

“너희 이거 전공해서 뭐 먹고살래? 어느 기업에서 너희들 뽑아주겠냐? 니체, 토마스만을 어따 써먹을 거야?”

타 과도 아니고 우리 과 교수가 한 말이다. 우리는 화가 나서 한바탕 성토하다가 곧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교수가 마땅히 우리 편이어야 하기에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 거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는 이미 유행이 지나간 언어인 데다 문학 전공, 크게 보면 문과생인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죄송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대학이 주로 대기업의 취업문을 뚫기 위한 관문으로서 기능한 뒤로부터 문과생, 특히 문학도들은 기업에서 쓸모 있는 인재가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우리는 대학 졸업장 외의 많은 것들을 거머쥐고 그들에게 보여줘야 할 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했다.


적당히 높은 게 아닌 거의 만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와 해외 연수, 각종 자격증과 인턴 활동이 있어야 겨우 입사 자격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소원하던 대기업에 들어간 선배도 있었고,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계에 등단하거나 지상파 아나운서가 되거나 연극, 영화 연출 분야로 빠져 사회적으로 이름을 얻은 선배도 있었다.


나는 애초에 일반 기업에 입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기들이 교육학이나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할 때 독일로 유학을 갔다. 우리 과 교수마저 ‘너희들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소리칠 때 나는 독일문학 전공자, 순수문학도로서 꿋꿋이 길을 걸어보겠다는 마음으로 2학년을 마치고 독일 Bonn으로 떠났다.


그땐 ‘문송‘해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틀렸을뿐더러 인문학적인 뿌리 없는 사회는 결국 모래성과 같다는 내 나름의 신조가 있었다. 과에서 단 한 명, 독일문학 전공자조차 미국이나 영국에 어학연수를 떠날 때 나 홀로 독일로 떠났다. 학교에서 나의 결정을 반기는 이는 독일인 교수 브로제뿐이었다.


독일문화원에서 두 학기 동안 어학연수를 받고, 학교 내외에서 알바를 두세 개씩 뛰어 비용을 모아 독일 유학 준비를 했다. 당시 독일 대학엔 학비가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도 기숙사 비용과 일정의 학생회비 정도만 납부하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외국인조차도 얼마든지 내국인과 동일한 조건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독일이었다.


이민 가방에 나무 도마와 북어포, 마른미역까지 욱여넣고 들어간 독일은 그야말로 별세상이었다. 나와는 아주 다르게 생긴 사람들, 단독 주택을 가르는 단정한 나무와 꽃들, 깨끗한 거리와 동네의 정확한 구획, 규칙적인 생김새의 건물, 감성적인 돌바닥과 깨끗한 공기 그리고 대부분 흐린 날들.


나는 일종의 교환학생 자격으로 독일 본 대학교에 두 학기를 등록하게 되었고,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머물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우리나라 대학 기숙사는 보통 캠퍼스 내에 있다. 그러나 본은 ‘대학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학 부속기관, 박물관, 도서관은 물론 기숙사마저 도시 구석구석에 혼재되어 있다. 유별나지 않게, 튀지 않게 동네의 건물과 조경에 조화되는 얼굴로.


우리 기숙사는 페르디난드 1번가에 있었는데 동네 주택들 사이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문 앞 작은 명패를 보지 않는다면 기숙사인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동네의 여느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 유학을 온 설렘과 기쁨, 신기한 마음의 지속 기한은 3개월이었다. 3개월이 지나자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나는 인간이 날씨에 이만큼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인지 몰랐다. 해 뜨는 날이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오고, 구름 낀 스산한 날씨가 보통날이 되자 숙였던 우울한 얼굴이 고개를 들고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다.


수강하는 수업이 많지는 않아서 오후 2시면 학교 일정이 끝났고, 여유 시간엔 같은 기숙사에서 살던 친구들과 어울렸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한국에 돌아가면 무얼 하고 싶고, 무얼 먹고 싶다고 도돌이표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기껏 외국 유학까지 와서 한국인 유학생과 어울리며, 한국 음식을 해 먹고,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들, 한국에서 먹고 싶은 것들을 떠들다니.

그때 그 시간을 조금 더 즐길걸. 과거의 나는 왜 주로 어리석은가.


기숙사에선 파티가 매주 열렸다. 파티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어두운 지하 공간에 병맥주 몇 박스를 가져다 놓고, 간접 조명 몇 개를 켜놓고, 비트감있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그게 파티인 것이다.


나는 학교보다 파티에서 독일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독일인 친구들은 뭐랄까. 평소 차분한 성격을 가진 나조차도 조금 버거울 정도로…진지했다. 쿵쾅쿵쾅 힙합 비트가 쪼개지는, 정신없는 파티 분위기에서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묻고 논하는 것을 ‘귀여운’ 춤 동작을 곁들여 할 수 있는 이들이 독일애들이었다.


백화점에 이불을 사러 같이 간 독일인 친구 마크는 이불 가게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네가 이불을 사는 기준을 말해줘. 말하자면 이런 거야. 봐, 이 이불은 3가지 장점이 있지. 1번 보온성, 2번 안티 알레르기, 3번 세탁의 용이성. 자, 네가 이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뭐야?”

이런 식이다. 인간 매뉴얼 같아서 빨리 친해지기는 조금... 어렵다.


나는 미국인과 대만인, 일본인과 친해졌다. 사교적인 자세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 적당한 사회적 거리가 우리를 우리로 쉽게 묶어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우리는 이웃 동네 기숙사에서 열린 파티에 가서 맥주를 몇 병 나눠 마시고 취기에 기분이 좋은 채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난 갑자기 버스 종점까지 가보고 싶었다. 즉흥적인 마음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근거 없는 용기와 무모함이 안에서 들고 일어섰다.


어두운 밤에, 11시가 넘은 때에 버스 종점에 가고 싶다는 내 결정은 아무에게도 동의받지 못했다. 친구들은 자기 기숙사가 있는 동네에서 차례로 내리고, 나는 버스 맨 뒷좌석에 혼자 앉아 종점까지 갔다.


버스 기사가 같은 말을 반복해 물었지만 나는 “Kein Problem!(문제없어요!)”을 반복해 소리쳤다. 이십 대의 무모함이여. 그것은 찰나의 죽음도 불사할 만한 것.


기사는 종점이라며, 나에게 내리라고 했다. 왜 하필 내가 탄 버스의 종점은 묘지숲인 것인가. 너른 터에 크고 작은 묘비석이 줄지어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얼근한 취기가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자 머리털이 곤두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1차선 도로 왼편은 묘지숲, 오른편은 잡풀이 무성한 공터였다.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 페르디난드 1가에서 족히 30분은 더 타고 들어온 것 같은데 과연 나는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살고 싶은, 살아서 돌아가야만 한다는 파충류 차원의 생존 본능이 내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었다. 나는 드문드문 이어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버스가 올라온 길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묘지숲 방향에서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나더니 고라니가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와 도로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를 쏘아봤다. 고라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 비명과 같은 흉악한 소리가 질렀다. 아아악, 아아악.


나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고라니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것을 지나칠 때까지 고개를 돌려 눈 맞춤을 했다. 다행히 고라니는 내게 별 흥미가 없었다. 마실 하는 중인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뜨거운 피를 식히는 중인지 고라니는 고라니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묘지숲을 타고 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형체 없는 존재가 나를 지나치며 스적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걸어 내려가는 동안 인적은 물론 인가조차 보이지 않았다. 묘지숲 너머 아래로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앞으로 난 길에 의지해 걷고 걷다가 생각이 점차 부정적으로 흘렀다. 어차피 한 길이므로 내려가다 보면 우리 동네에 접어들 것이고 결국 기숙사에 닿을 것이란 판단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곧 일간지에 실종된 유학생으로 실릴 내 얼굴이 떠올랐다.


20분쯤 더 걷다 보니 눈앞에 인가가 보였다.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대문 앞에 조그만 알전구들이 걸려있었다. 나는 현관문에 노크를 하고 누군가 나와주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노크를 하고 한참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기에 포기하고 내려갈 참에 나이트가운을 입은, 머리가 부스스한 중년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길을 잃었어요. 여기서 페르디난드 1가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시나요?”

그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멍하게 바라보았다.

“몰라요. 계속 밑으로 내려가면 될 거예요.”

쾅.


문이 닫혔다. 자정이 다 되는 시간에 동양인 여자애가 문을 두드리며 길을 물으니 마음을 쉽게 열긴 어려웠겠으나 조금의 친절을 베풀 순 없었는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방법은 아는 동네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걷는 것 외에는 없었다. 걷기 시작한 지 근 1시간 만에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반갑기보다 무서운 마음이 불쑥 들었다. 들짐승한테 쫓기면 달아나면 되고, 부랑자가 덮치면 개처럼 싸우면 되지만 차에 납치되면… 승산이 없었다. 나는 도로가에서 떨어져 조금 속도를 높여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긴장하며 걸은 탓인지 가래톳이 서서 오금까지 저려 왔다.


운전자는 차를 세우더니 천천히 후진을 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놈’과 마구잡이로 싸워 살아나리라는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고 서서 차를 쏘아보았다.


“이 시간에 위험하게 왜 혼자 걷고 있어요?”

차에 탄 이들은 독일인 커플이었다. 그들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아… 길을 잃었어요. 버스 종점에서 내렸는데 집에 가는 길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1시간은 걸었어요.”

내려온 차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선한 두 눈망울을 보자 다리 힘이 풀렸다.

“타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눈물이 말 그대로 주룩주룩 흘렀다. 이제 살았다는 안심 때문이었는지, 이제야 다정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기쁨과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는지.


“당신들은 천사예요. 이 시간에 당신들을 만난 건 내게 기적이에요.”

커플은 크게 웃었다. 그러곤 내게 속삭였다.


“오늘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엔 기적이 일어나죠.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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