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수능, 포기하는 용기
“수험생 여러분, 건승을 빕니다.”
어느 해 수능시험 전날 밤 9시 뉴스 앵커가 이렇게 방송을 맺을 때 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길고도 잔혹한 하루를 또 견뎌내야 하는 수십만 명의 가여운 아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통과했던 그 '지옥문'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허리 주위에 둘레둘레 붙은 나잇살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수능시험을 치는 꿈을 꾸었다. 수험실에 들어가니 팬티 바람인 걸 알고 간신히 윗옷을 끌어내려 엉덩이만 가린 채 교실문을 뛰쳐나가거나 시험 문제를 다 읽기도 전에 글자가 연기처럼 사라져서 백지가 된다거나. 나는 무의식 중에 수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구르고 헤매었다.
내가 그 나이가 되기 전까지 고3은 내게 신비로운 존재였다. 입시 공부의 종착점은 어떤 모습일지, 엉덩이를 몇 시간이나 의자에 붙이고 앉아있을지, 12년 공부의 아웃풋이 어떻게 나올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기에 내 눈에는 어른이 다 된 그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막상 내가 고3이 되자 김이 빠졌다. 고3이라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건 없었다. 예체능 수업이 자습 시간으로 바뀌고, 야자 시간이 늘어나고, 면학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배려와 ‘거의 어른‘이 된 열아홉 살의 우리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눈높이를 맞춰주는 게 느껴지는 정도.
고3은 고2의 연장이었고, 다음 스텝일 뿐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 호들갑을 떨던 나와 친구들은 생각보다 시시한 수험생활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대신 신화적인 고3 선배의 입시 스토리에 쉽게 매혹되었다. 공부를 꾸준히, 열심히, 원래 잘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오로지 기막히게 운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모여들고, 그것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운 좋게 수능 대박이 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 때는 수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정시, 수능 성적으로만 대학을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할 만한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수능 때 대박이 나면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었고, 또 그랬다.
나는 운 좋은 선배들의 성공 스토리를 듣고 퍼 나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어댔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매사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자아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나는 '하필이면' 고3 때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었는데 고3 수험생이라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감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3이라면 으레 웃음과 활기를 잃는 때이고, 그것이 또 수동적으로 '권장되는'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우울감은 종종 태도가 되어 팝콘처럼 튀어나왔는데 '원래 그러지 않는 아이', '얌전하게 생긴 아이'라서 담임에게 가벼운 훈계를 듣고 마는 정도였다. 아침 등교 시간에 학교 정문 앞까지 왔다가 집으로 되돌아가는 마을버스를 탄다거나 수업 시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온다거나 하는 나조차도 이해 못 할 돌발 행동을 했다. 나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미친 듯 춤을 추고 싶었고, 불현듯 신발, 양말을 벗고 길을 걷고 싶었고, 비가 오면 뛰쳐나가 비를 흠뻑 맞으며 막다른 길이 나올 때까지 질주하고 싶었다. 폭발할 매개를 찾고 부딪쳐 나를 흔적도 없이 터뜨려버리고 싶었다.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나는 왜 아침부터 밤까지 여기에 갇혀있는지, 좋은 대학을 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답 없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루하루를 언제 모래가 될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깨는 기분으로 살아냈다. ‘하필이면’ 고3 때. 발등에 붙은 불이 꺼질세라 입시에만 몰두해야 하는 그때.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남들이 진통을 겪을 때 순조롭게 지나간 나의 사춘기 청구서가 후불로 차례차례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창밖을 내다보는 이유와 날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나가서 인생을 리부트 하고 싶다는 허망한 꿈을 품는 이유를.
나는 수능을 보기도 전에 내가 시험을 잘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당연히'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운이 내 곁을 '천천히' 지나간다고 해서 알아챌 만한 영민함도, 잡아챌 만한 용기도 내겐 없다고 믿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집안에서는 가족 간에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마음이 방치된 채 쌓여, 서로 간 정으로 덧대어진 낡은 끈이 나긋나긋 헤어져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할머니와 엄마, 아빠와 할머니, 엄마와 아빠. 어른들 중에 어느 하나 지옥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제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끝 모를 지난한 시간 위에 오롯이 서서 매를 맞 듯 견디어냈다.
나는 수능 전날 도리어 마음이 가라앉았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긴장할 일이 없다. 수능을 보기도 전에 나는 우연히 성당 주보 안에 끼워진 한 가톨릭 계열 대학교의 홍보물을 보았고, 보자마자 그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터였다. 일정 수능 등급만 나오면 4년 간 장학금을 주고, 사회복지 계열 특수학교라 하니 ‘배워서 봉사나 하자.’라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예상대로 수능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고, 나는 정말 그 대학에 지원했다. 담임이 의아한 얼굴로 "그래도 성적에 맞춰 가야지. 괜찮겠어?"라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 대학에만 지원을 했고, 붙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고요한 감정 밑바닥엔 우울감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지만 내가 지원한 대학에 입학만 하면 산속에 숨어버릴 수 있고, 수행할 요령으로 도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겠다고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