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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택시비의 의미

by ondo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난 소위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방송사 시험 준비로 분주했다.

대학에 다시 들어갔고, 독일에 다녀오느라 남들보다 늦은 시작이었다. 스물여섯. 군복무를 한 남자 동기들과 같은 나이였다.

"야, 아나운서는 아무나 돼?"라는 불퉁스러운 고모의 목소리를 마음 한 구석에 가둔 채 나는 '아무나'가 아니라서 그런 말엔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독였다.


그땐 나도 이십 대다운 청춘이라서 나의 작은 재주는 크게 보고,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현실은 흐린 눈으로 보았다. ‘혹시’ 하고 시작되는 마음속의 말들을 맺지 못한 채 안에서 피어오르는 의심을 꾹 누르며, 관성적으로 시험을 치르러 다녔다.

몇 번의 아나운서 시험을 치러보니 아무도 없는 집에 언젠가 들어올 집주인을 막연히 기다리며,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원자도 안다. 면접관이 내게 매혹되었는지 아닌지를. 나는 시험을 보는 내내 내게 매력을 느끼는 면접관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사람은 단 1초 만에도 외로워질 수 있다는 걸. 카메라에 잡힌 내 얼굴을 화면으로 본 면접관이 따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난 불합격을 예감했다.


난 수천 명의 지원자 가운데 하나, 들러리였다. 결국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경험을 몇 차례 했고, 포기했다.

내가 들어갈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쓸쓸해졌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아무리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고 방송용 메이크업을 받고 카메라 앞에 선들 민낯에 청바지를 입은 미스코리아 출신 지원자보다 돋보일 수 있겠는가.


방송사가 아나운서를 외모의 재능 순으로 뽑는다면, 내가 낙제를 받은 데 불만이 없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지원자들을 둘러보면 스스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럭저럭 잘하거나 꽤 단정하고 잘생긴 사람들이 물 반 고기 반처럼 모인 이 자리에서 정말 있는 힘을 다해도 매우 탁월한 단 한 명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게 된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수백만 원의 스피치 레슨비, 시험을 볼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메이크업과 헤어 비용, 정장 마련 비용. 일회성의 소모적인 꾸밈비가 많이 들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공강 시간에 도서관 근로장학생을 하고, 틈틈이 과외를 뛰며 용돈벌이를 했던 내겐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었다.

언제 될지, 아마도 안 될 것 같은 시험을 치르느라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는 일이 잦아지자 포기하는 데 그리 애가 닳진 않았다.


나는 기자직으로 지원 방향을 돌렸다. 언론사 입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원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펜대로 더 나은 세상을 구현하겠다든가, 사회의 어둠을 밝혀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거창한 지원 동기는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선택지를 바꿨을 뿐이었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땐 시험을 보면서도 불합격 예감이 든 것과는 달리 기자 시험을 볼 땐 어쩌면 붙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땐 전형 하나를 넘기가 그렇게 어렵더니 기자직은 시험을 치자마자 최종 전형에 올랐다. 스터디에서 대비용으로 훑어보았던 것들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 나는 etf나 서킷브레이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지만 단답형으로 써냈고, 맞혔다. 운이 좋은 때였다.


나와 두 번이나 연을 맺을 뻔한 언론사는 보도 전문 채널인 Y사였다. 최종 임원 면접을 보기 전 일주일간의 실무 테스트 전형이 있었는데, 시험관이 오전에 돌발 주제를 내려주면 취재를 뛰고 다시 들어와 선임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고를 하고 평가를 받는 절차였다. 말하자면 합평 같은 것이다. 거기까지 올라간 지원자는 열두 명이었다. 문턱만 넘으면 꿈꿔왔던 직업이 내 밥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잘하고 싶었다.


잔혹한 합평 시간이 끝나면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말이 저녁이지 알코올 테스트다.

앞으로 선배라고 부를지 모를 늙은 기자들이 지원자들에게 술을 먹였다. 부대볶음 한 냄비에 소주병이 하나둘 테이블에 쌓여가고, 꼿꼿한 자세로 술을 받던 지원자들도 하나 둘 바닥에 쓰러져 시체가 되었다.


취기로 공기가 느슨해질 무렵 시험관들은 지원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나는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고 화장실에서 토하고 울었다. 그러고 돌아와서 그네들이 따라주는 소주를 마셨다. 취하지 않기 위해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목구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소변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할 정도가 되면 집에 가서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나와 새벽 3시 반부터 관할 경찰서, 소방서를 다니며 하룻밤 일어난 사건 사고를 취재했다. 이를 일명 마와리 돈다,라고 했다.


나의 면접관이자 선배 기자들은 술자리에서 사담하는 식으로 특명을 내렸다. 경찰서에 들어갈 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했다. 경찰서 문을 발로 차면서 “야 이 개새끼들아!"하고 들어가란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리고 나는 그런 인간이 못된다. 그렇게 생겨먹질 않은 인간이다. 되레 박카스 한 박스를 사서 경찰들에게 수고하십니다, 하고 돌리며 공손히 인사했다.


취재를 하는 중간에도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내 사수 역할을 맡은 선배가 욕을 섞어가며 몰아붙였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보고 하니 ‘차량이 몇 인승인데?’, ‘거기 탄 사람이 몇인데?’, ‘몇 차선인데?’라는 식의 질문들을 던졌을 때 대답을 우물거리면 바로 상스러운 욕이 귀에 꽂였다.


실무테스트 3일 차가 되자 육신과 정신을 이어주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움직이니 걷고 팔이 움직이니 살아는 있구나, 하는 순간이 이어졌다.


길어야 한두 시간 쪽잠을 자고, 육신이 소주로 절어있으니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말인지 욕인지, 시간은 몇 시인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4일 차에 흥사단에서 취재를 한다고 비척대고 돌아다니다가 혜화동 골목 어귀에 있는 뚜레쥬르에 들어가 단팥빵 하나를 사서 뜯어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엎드려 잤다. 취재도 무얼 했는지, 무슨 정신으로 다녔는지 기억에 없다. 택시기사가 대낮인데 이동하는 10분 동안 그렇게 코까지 골면서 자는 손님은 처음이라며 대체 무슨 일 하시느냐 물었다.


테스트 마지막 날 나는 기자를 업으로 삼는 걸 다시 고려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웬만한 체력과 정신력, 뻔뻔한 마음가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자의 수명이 다른 직업군보다 왜 짧은지, 짧을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되었다.


좋은 시험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 채용하려는 이도, 지원하는 이도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적합한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 지원자 입장에서도 매우 성실하고 정성스러웠던 시험 절차였다고 이제와 나는 생각한다.


내 결정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몇 달 전 J일보에 입사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거 테스트라서 오버하는 거지? 진짜 기자 일상이 이렇진 않지?"

“얘기 안 했냐? 나 집에 한 달에 한두 번 들어가. 빨래하러. 정확히 기자의 삶을 보여주는 진솔한 시험 과정이군. 더 미치는 건 5년 차 됐다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거야. 꼰대가 되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없는 거지.”

“아니 사람이 살 수 없는데? 이렇게 해도 사람이 산다고? 살아진다고?”

“쪽잠보다 밥이 낫더라. 잘 시간에 밥을 잘 챙겨 먹도록.”


나는 전의를 상실했다.

아나운서 지원자로서는 외모든 끼든 발군의 무언가가 없었고, 기자 지원자로서는 한계를 뚫을 만한 강인한 힘과 집요함이 없는 이였다. 나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나는, 내게 무해한 이에게 "야 이 개새끼들아!" 할 무모한 용기도, 이유 없이 경찰서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갈 몰염치도 없었다. 내겐 없는 장르였다.


나는 tv에서 보던 유명한 남자 앵커에게 ‘저렇게 멍청한 놈이 여기 와있으니. 너는 공무원 대변인이나 해라. 얌마! 너 어느 대학 나왔어?’라는 소리를 끝으로 듣고 회사를 나왔다. 실무테스트 마지막 날이었고,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빌딩 위에 걸린 사명을 눈에 한참 담았다.


어제, 오늘 그리고.


그때 누군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뒤에서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높은 로비에서 발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게 울리는지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열두 명의 지원자 가운데 하나였다. 지역 mbc에서 아나운서 경력이 있는 키가 크고 외모가 이지적으로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시험 보느라 힘들었죠? 고생했어요.”

그녀도 나와 같은 입장의 지원자인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한참 생각했다.


“집에 어떻게 가요? 늦었는데.”

“지하철 타고 가야죠. 막차 놓치기 전에.”

그녀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내 손에 급히 쥐어주었다.

“택시 타고 가요."

“아니에요. 왜요? 이걸 왜 줘요? 됐어요.”

“꼭 기자 돼서 우리 다시 만나요. OO 씨 이미지가 깨끗해서 계속 마음에 쓰였어요."


나는 불합격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를 떨어뜨린 그 언론사 TV채널에서 황금 시간 대에 뉴스 앵커를 맡은 그녀를 보았다.

나는 지금도 tv에 나오는 그녀를 보면서 나와 어떤 관계도 아닌 그녀가 내게 준 택시비의 의미를 생각한다.


동정이나 연민이면 어떤가. 이 또한 다정한 마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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