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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

풋-

by ondo

싱그러워 파랗고,

덜 익어 파랗고,

멍들어 파랗고.

청춘.


갓 스물이 넘어서부터 품었던 단 하나의 꿈, ‘언론인’이 되겠다는 마음을 어렵게 내려놓았다.

실력이 부족해서, 운이 부족해서, 체력(끈기)이 부족해서, 용기가 부족해서… 해서… 해서 결국은 실패.

내 인생의 다음 장은 목차나 개요 없는 순수한 백지였다.


나는 플랜 B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호되게 방황했고, 미망에 빠졌다.

어디에 매인 시간은 없으나 돈도 없으니 동네 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애들을 가르쳤다.

퇴근한 뒤 맥주를 정화수 떠놓듯 달빛이 떨어지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다시 생각했다.

매일 밤 고요한 시간이 찾아오면 손에 쥔 것 없이 벌거벗은 나와 마주했다.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 막막했다.

지금은 밥벌이가 꼭 내 꿈일 필요도 없고, 수단이거나 그것마저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 내 꿈은 곧 직장이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를 듣고 자라서일까? “넌 어떤 사람이 되는 게 꿈이야?”를 듣고, 그 물음에 대한 해를 찾아 어른이 되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돌격, 앞으로”를 외치다가 제자리로 퇴각한 자리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함께 스터디를 했던 사람들은 기자가 되었고, 피디가 되었고, 방송기술 엔지니어가 되었다.

꼭 그런 일이 아니어도... 뭐라도 되었다.

난 무엇도 아닌 채로 대학 졸업 장기 구직자가 되었다.


나는 실패자였다.

부모님에겐 면목이 없었고, 친구들, 지인들에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한 대학 동기의 장난에 말꼬리를 잡아 못된 말로 상처를 주었고, 만나자는 친구들의 연락은 없는 경조사를 만들어 내거나 감기(실은 알레르기성 비염)를 핑계로 번번이 거절했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사는 건 그저 거대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거라고, 돌에 차이고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라고.

그러나,

내게도 나의 계절은 분명히 온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다. 그땐 그런 말을 귀 담을 나이가 아니다.

사람도 다 익는 때가 있다.


늦은 나이에 졸업을 했고, 소위 언론고시를 보느라 2년 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내 나이는 이십 대 후반이 되었다.

조급하고 무력한 마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래도 눈을 뜨면 매일 도서관에 갔다.


집에 있는 건 백수고, 도서관에 있는 건 구직자니까. 양심상,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매일 동네 도서관을 다녔다. 목표가 없으니 별 열정도 없었다. 언제 들였는지 모르는 도서관 구석의 녹슨 음료 자판기처럼 나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내 열정 버튼을 눌러줄 계기나 기회를 손님처럼 기다렸다.

목표가 사라져 공중에 떠버린 마음이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파트타임 알바라도 직장은 직장이었다. 중간, 기말고사 대비며, 학부모 전화 상담이며, 동료 교사들과의 교류, 원장의 채근과 훈계.

나는 학원에 3시간 정도 매여있었지만 내가 그곳에 대는 시간과 에너지는 그 배였다. 시급은 명목상 타 알바자리보다 높았으나 높은 덴 이유가 있고 숫자와 치환되는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법.


아침엔 도서관에서 게으르게 공부했고, 오후엔 학원에서 돈을 벌고, 퇴근 후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사서 집에 들어가는 일이 그럴듯한 직업이 되었다.


매일 씻고 자고 밥을 벌어먹는 일과 동네를 할 일 없이 걷는 일들이 일상이 되고 일이 되면 그다음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건 부딪혀서 실패하는 것보다 나쁘다. 난감한 일이다.


내겐 돌파구가 필요했다. 내 인생을 전환할 만한 어떤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일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집과 동네, 학원은 내게 노동의 공간이었으므로 익숙함에서 낯섦의 공간으로 이동하면 진짜 나를 마주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특별한 계기를 찾던 중에 개발도상국 원조 단체인 한 NGO에서 올린 청년 문화교류단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40세 미만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몽골 문화 체험, 문화교류를 위한 청년단을 모집하는 공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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