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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

헤어질 결심

by ondo

택시 기사가 그의 셔츠 깃을 말아 쥐고 흔들었다. 그가 흔들리는 방향에 따라 택시기사도 같이 휘청였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셔츠 단추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친구가 비척거리다가 팔을 휘젓더니 기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나는 기묘한 형태로 엉켜있는 둘 사이에 아이처럼 끼어들었다.


애가 탔다. 어느 누가 경찰에 신고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말 경찰이 오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의 갈래에서 헤매다가 눈물이 났다.


싸우는 어른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숨어버리거나 우는 일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무력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난 그를 택시기사에게서 떼어내려고 뒤에서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있는 힘껏 당겼다. 하지 마, 놓으라고, 제발…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빌었다.


기사는 그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눈을 치켜떴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애미 애비'를 찾았다.

그가 배칠대다가 기사의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택시기사는 그의 몸을 자기 쪽으로 한껏 끌어당겼다가 쓰레기 버리듯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오렌지색 주차금지 입간판에 등을 부딪히고 보도블록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당장 달려가서 몸을 일으켜줘야 할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떨어진 안경을 찾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다가가 몸을 굽신거려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남자친구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택시기사가 보도 연석 아래에 떨어진 안경을 들어 머리 위에서 내려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택시기사는 그가 다시 일어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움찔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제 그만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그는 걱정했을 것이다.


난 두 팔을 휘적거리며 다가오는 남자친구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을 밀었다. 한두 번 때리듯 밀치다가 그가 가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그의 몸을 막고 섰다.


"하지 마! 왜 그래? 하지 말라고. 정신 차리라고. 제발."

나는 애원했지만 내가 중얼거리는 건지 소리를 내지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술을 마시다가, 술이 그를 마시다가, 술이 그를 삼킨 밤이었다.


그는 씨발 비켜, 하면서 내 어깨를 왁살스럽게 잡더니 있는 힘껏 옆으로 밀쳤다.

나를 물건 따위를 던지듯 바닥에 내버렸다. 아무렇게나.


나는 기우뚱 옆으로 밀려나다가 경비실 초소 앞에 놓인 중국 요리 그릇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릇에 남아있던 짬뽕 국물이 공중으로 튀면서 흰 블라우스와 청치마에 흘러내렸다.

구두 한쪽이 벗겨지고 스타킹이 찢어졌다. 짬뽕국물인지 피인지 모를 벌건 액체가 커피색 스타킹 위로 얼룩덜룩 번졌다.

엉덩이 쪽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손바닥이 쓰렸다.


삿대질과 멱살잡이가 짧게 이어졌다. 나는 더 이상 야만스러운 두 사내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평온무사한 보통의 밤이 간절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덩어리째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를 꿀꺽 삼켰다.


"호래자식 같은 새끼. 너 다음에 나한테 걸리면 뒤져. 부인이나 모시고 들어가서 잠이나 쳐 자. 어휴 재수가 없으려니까."

택시 기사는 바짓자락을 탁탁 손으로 털어내더니 서둘러 택시에 올라 유턴을 해서 정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와 함께 사는 둘째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서, 그 자리를 지킬 이유가 더는 없어서 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버려두고 대로로 나왔다.


좀 전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다가 접질린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구두를 벗어서 맨발로 걷다가 다시 구두를 신고 걸었다.

막차는 이미 끊겼고, 지갑엔 현금 7천 원과 버스카드뿐이었다.

무작정 한강 방향으로 걸었다. 첫차 시간이 되면 여의도 부근에서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그가 우리 동기를 주먹으로 때려눕혔을 때 헤어졌어야 했어,

그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꼭 치러야 할 의식처럼 행인에게 시비를 걸 때 헤어졌어야 했어,

아니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을 때 그를 알아봤어야 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놓인 미션처럼, 뛰어넘거나 혹은 빠져버릴 구덩이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미련스럽게 시간을 덧붙여 끌어온 몇 년의 시간이 공허했다.


1시간 가까이 걷다 보니 눈앞에 원효대교가 보였다.

나는 목적지에 닿은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렸다.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한강물을 내려다봤다.


태연히 부는 강바람이라도 맞으면 불툭거리는 마음이 잠잠해질 것 같아서 물결이 작게 이는 강물을 바라봤다. 텅 빈 눈으로.

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리고 발끝이 아려서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나는 고개를 양팔에 묻고 흐느꼈다.

그와 헤어질 결심을 굳힌 것 때문인지, 구질구질한 상황 때문인지, 넘어질 때 삐끗한 허리가 아파서 그런 건지, 차비가 없어서 집에 못 가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난 나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이런 일을 자초한 건 바로 너고, 모두 다 단호하지 못한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응당한 벌을 받아, 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에게 화를 냈다.


"저기요, 괜찮아요?"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자가 귓속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 본 여자가 내 등을 조심스레 토닥토닥 두드리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내가 벗어놓은 구두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블라우스에 튄 벌건색 국물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다친 거예요? 119 불러줄까요?"

"괜찮아요."

"근데 피가…"

"피 아니에요."

"아 다행이다. 요 밑에 내려가면 편의점 있어요. 따뜻한 차라도 사줄까요? 같이 마셔요."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기 같이 보일까 봐 걱정했지만 이런 상황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도 우스워서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뭐라고 응해야 진실에 가까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그녀는 많아 봐야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짧은 순간에도 여러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다.

조깅을 하던 중이었는지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가까이 느껴졌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내게 구두를 신겨주고 내게 팔짱을 끼고서 편의점으로 날 데리고 갔다.


그녀는 편의점 데크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날 앉혀 놓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사 온, 유리병에 든 따끈한 두유를 홀짝이며 말했다. 막차를 놓쳐서 집에 못 갔을 뿐이라고, 첫차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가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죽을 결심을 하기 전에' 나를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나의 안위를 살폈다.


나는 그녀가 불러준 콜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4만 원을 쥐어주며 목적지까지 잘 부탁한다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생각 말고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자요. 자고 나면 나아져요. 알겠죠?"

나는 그녀의 눈에 시선을 맞추면서도 차마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


“계좌번호…”

그녀는 내가 말을 맺기도 전에 택시 문을 쾅 닫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택시가 멀어질 때까지 서서 지켜보는 모습을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고마웠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했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흔하고 의례적이어서 차마 할 수 없었다.

고맙다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녀의 선의가 타인에게 베풀어 마땅한 것처럼 느껴질까 봐, 그녀가 그저 그런 착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고 함부로 분류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이제는 잊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내 마음 안에 분명히 살아있다.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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