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는 오늘도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술 냄새가 좁은 방 안에 가득하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안개가 걷히고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오늘 아침 방은 비교적 깔끔하다. 구석에 술병과 몇 가지 음식 쓰레기를 제외하고는 봐줄 만하다. “제길! 아얏” 크리스는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낸다. 팔이 욱신거리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또 그 짓을 한 건가?” 천천히 손목을 들어 눈앞에 가져가 본다. 여러 줄의 빨간펜 상처 흔적이 있다. 자책과 슬픔, 설움이 한 번에 몰려온다.
응급구조학과 졸업식 날 크리스는 해방감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잘 웃지 않는 그녀였다. 1년 유급한 친구 루시와 가족이 옆에서 연신 축하를 해주고 있다. 엄마는 딸이 이제 스스로 많은 것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그녀였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하셨고,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싶어 하셨다. 두 분을 보며 같이 기분은 좋으나 묘하게 불안이 밀려왔다. "취업은 잘 될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꽃다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때는 졸업 6개월 전,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응급실 훈련이 가능한 병원. 크리스는 긴장하며 실습 중이다. 자취를 하며 몇 달 병원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 7시 눈 떠 출근하려니 배가 아프고 두통이 몰려온다. 두렵다. 긴급한 대응, 소심한 자신에게 응급실의 삼엄하고 난장 분위기는 적응이 잘 안 된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 너무 다르다. 실습 2달 동안 ‘그만두고 싶다’라는 생각을 1시간이 멀다 하고 반복했다. 병원서 함께 실습 중인 <져니>와 <윌링니스>는 잘 적응 중인 것 같다. 타고나길 적응 잘하기 위해 태어난 애들 같다. 잔소리도 듣고 소리 지르듯 훈계하는 감독자의 부정적 피드백을 들은 날에는 의식처럼 계단 구석에서 눈물을 훔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도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 곧 졸업이고 나는 이 과정을 마칠 자격이 있다."라고 말한다.
“남을 돕고 싶어요.” 크리스는 면접 장면이 떠오른다. 연신 의심의 눈을 보내던 면접관이 서류 한번 보고, 크리스의 얼굴 한 번을 보면서 왜 이 전공을 하고 싶냐고 묻던 장면이 달리는 기차 풍경처럼 지나간다. 말 수가 적고, 목소리가 작고 일종의 사회불안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는 듯했다. 그렇다. 크리스는 성향을 떠나 순수하게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뭐하러 왔나?” 크리스는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간다. 상담실 문 앞에서 한 숨 짓고 5초간 머물다가 문을 열었던 그녀다. 상담을 받으러 왔다. 요즘 유행한다는 그 심리 상담을 받으러 왔다. 남자들과 지내기 불편한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엘리>라는 남자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불편했다. 생각은 실제와 항상 달랐다. 말투와 목소리는 큰 덩치와 달리 여성스러웠다. 안경 너머 충혈된 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상담 중에 계속 창피하게 눈물이 났다. 말이 평소보다 더 나오지 않았다. “아구.. 그동안 얼마나 힘들까요. 정말 많이 힘들었네요. 크리스 씨.....(침묵) ”, “우리 잠시 지금 느낌에 머물러 봅시다.”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한참 침묵을 주고받은 뒤 상담사 엘리가 한 말이다. 그 말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견고한 무장이 방어가 풀어졌다. 한참 울었다. 그는 티슈를 크리스 가까이 밀어주었다. 눈물 때문에 상담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의미 없이 계속 눈물을 찍어 닦았다. 너무 닦아내 볼이 쓸려서 헐 지경이다. “숨~ 같이 숨이나 좀 쉬어 봅시다.” 상담사의 말이었다. “마시기보다 길게 내쉬는 숨에 집중해보세요.”라는 말이 들린다. 내가 “호흡도 이렇게 어색했나?”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쉬니 숨이 돌고 아까보다 편안해졌다.
“정말 많이 힘들었군요. 답답하고 숨쉬기 어려운 상황이 느껴져요. 많이 힘들다 보니 우울과 비관도 왔네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잘 견뎌왔네요. 혹시 자살 생각이나 계획은 없었나요?” 엘리가 능숙하고 직접적인 질문을 했다. 이렇게 빨리 치고 들어 올 줄 몰랐다. 당황했다. 또 눈물이 났다. 크리스는 자해나 자살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끄덕이며 “네 있었어요. 여러 번.. 어제도...” 상담사 엘리의 목소리 톤이 낮고 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편안하기도 긴장되기도 했다. 둘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크리스의 힘든 맥락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직접적이기도 하고 간접적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듯했다. 크리스는 자기비난과 자책이 몰려왔다. 나는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는가. 나는 왜 내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가. 아니 말로 잘 표현을 못하는가. ‘자기주장’이라고 말하는 그런 표현이 힘들었다. 오래된 모습이다. 힘들면 더 동굴에 들어가고 억압은 심해진다. 그런데 그의 머물기와 질문의 맥락은 힘이 있었다. 크리스는 마음이 진정되고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자신이 힘든 이유와 처음 입사한 직장 환경이 견디기 쉽지 않은 곳이라는 것이 명료화되었다. “타당화?” 상담사는 타당화라고 말했던 것 같다. “힘들만하네요. 누구도 견디기 힘든 환경이에요. 그동안 훈련받은 일이 아닌 엉뚱한 일을 하고 있네요.”라는 말에 다시 울컥하고 눈물을 쏟았다. 크리스는 스스로 비난을 하고 있었다. '나만 적응을 못한다고, 내가 잘못이라고, 내가 문제가 있다'라고 도움 안 되는 자책을 하고 있었다. “자책은 우울에 도움 됩니다. 자신을 도와줍시다. 남도 좋지만 일단 자기 자신부터 구합시다 우리....”라는 말이 상담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 신발 주변에 맴돌았다.
엘리는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훈련을 받은 임상심리사였다. 그래서인지 병원 시스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공감을 받았고 울림이 있었다. 남자 상담사에 대한 편견도 깨졌다. 병원 의사들의 딱딱하고 불친절하고 무례함으로 위축되었었는데 다 그런 것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말만 친절하지 약간 고압적인 태도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수술 방에서 사람이 없다며 어시를 할 때 행동 느리고 자꾸 떤다며 “아씨! 정신 안 차릴래?”라는 그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되면서 가뜩이나 남자들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남자 환자만 봐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했다. 외과에서 TA환자를 드레싱을 하는데 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키득거리며 맞은편에서 농을 던진다. 어깨를 드레싱 할 때 눈 고리 길게 배시시 웃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다. '예쁜 아가씨가 옷을 벗겨주고 소독도 해주고 입혀주고 얼마나 복이 많냐'라고 음흉하게 말했다. 얼굴이 홍시보다 더 붉어졌다.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옆으로 담당의가 잠시 머물다가 지나갔다. 이 얘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크리스의 보호에는 안중에도 없어서 더 화가 났고 서운함이 몰려왔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부친과 반주 한잔하며 어렵게 말을 했을 때 '사회생활이 다 그렇다'며 '네가 참아야 한다'는 말이 더 큰 상처로 들어왔다. 마음이 헌 입 안의 매운탕처럼 맵고 혼탁했다.
<져니>에게 전화가 왔다. 상담 어땠냐고 묻는다. “그냥...”, “상담료가 좀 비싸...”라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상담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흐른다. 전화를 짧게 끊고,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렀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배가 고픈 것 같다. 김밥이며, 스트레스를 풀어줄 젤리며 이것저것 샀다. “술은 당분간 회복에 도움이 안 되니 도움 되는 것을 마시면 좋습니다.”라는 선생님 말이 지나간다. 크리스는 요즘 조금만 마셔도 필름이 끊겼고 우울이 증폭되어서 자해를 반복하긴 했다. 스스로 술 취한 자신이 두려웠다. 그런데 술을 사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생각과 행동은 꼭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은 생각으로 보고 구름처럼 보는 것을 해봅시다.” 상담사 엘리의 말이다. 그의 말이 좀 귀찮기는 하지만 자꾸 반추가 되었다. 술은 괴로움을 잊는데 도움이 된다. 일단 한 캔만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지는 않기로 했다. 상담사가 상상 속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모양새가 불편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담당 상사와 면담을 해봤나요?”, “고충에 대해 얘기하는데 어떤 마음이 방해가 되었나요?”, “진로를 잘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여러 가지 장단점을 따져보았듯이 마음이 떠났는데 몇 년을 꼭 채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요즘은 코로나 시기 이후 구인 공지도 많이 나고 갈 수 있는 직장이 많다고 하니..” 부드럽지만 방향이 병원 출구로 이미 가서 기다리고 있는 듯 느껴지는 엘리의 말이다. 크리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크리스는 이것저것 하려고 생각하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회식 자리에서 힘들다는 얘기도 했다. 담당 과장에게는 환자 중 일부가 성희롱을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 동료가 대신 말해주었다. 그치는 다음 주에 퇴원을 한다. 크리스는 이 병원 입사 이후 자주 부서를 옮기고 역할도 이것저것 주어져서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병원 시스템도 사람을 부리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1-2년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간호사는 많은데 사람들이 그놈의 '정신력' 탓을 했다. 두 번째 엘리와의 상담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훈련을 조금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색해 죽겠는데, 상담사가 상사나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표현해보라고 해서 짜증이 나고 불쾌했다. 그래도 상황극처럼 꾸역꾸역 끌려가듯 말하고 나니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크리스는 “과연 내가 말할 수 있을까? 꼭 해야 할까?” 집에 가는 계단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한다. 마음처럼 어둡다. 구름이 끊임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3개월 후 크리스는 인사 면담을 하고 있었다. 퇴직 계획에 대해 명료하게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 놀라고 있다. “한 달 후 20일에 퇴직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1년 안에 세 번째 상사가 된 과장에게도 의사를 명확히 전달했다. 그가 당황하는 표정이 컸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를 이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2년 경력을 무조건 채워야 한다는 '당위적 사고'에 갇힌 그녀였다. 생각이 유연해졌다. 자취하며 다니는 이 직장이 힘들었다. "회피가 아닌가?" 스스로 생각도 많이 했으나 그녀는 더 좋은 직장을 다닐 권리가 충분했다. 이직하는 새 병원은 작지만 교대도 아니었고, 신생 병원으로 깨끗하고 시스템도 좋다고 인터넷에 연신 찬사가 쏟아졌다.
상담 줌 대기실. 열 번째 만남이다. 상담사 엘리도 크리스의 드디어(?) 결심에 대해 듣고 격려와 응원을 해주었다. 용기 있는 시도에 아빠보다도 더 크게 기뻐하는 목소리가 줌 온라인 너머 들린다. ‘가치 전념’을 응원한다고 반복 말하곤 했던 그였다. 야간 대학원도 등록했다. 상담받고 있으니 이제는 약만 주겠다며 뚱한 표정으로 진료해주던 커다란 골프 브랜드 로고가 가슴에 새겨진 왕 반지를 낀 의사도 이제는 안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새 직장 가까이 새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찾았고, 유지치료는 곧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했다. “크리스씨, 불안과 같이 가야 해요. 불안은 기능이 있어요. 불안과 사이좋게 지내봐요.”라는 엘리의 말이 지나갔다. 크리스는 새 직장에서도 잘 못 지낼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복식호흡, 심호흡을 한다. 어쩌면 전공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나간다. 그래도 지긋지긋한 첫 직장을 안 나간다고 생각하니 묘한 시원함, 희망감이 왔다. 어제도 병원 내 크고 작은 사고가 나서, 외부에서 조사가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크리스는 전과 달리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주기로 했다. “나의 부적응은 적절하다”라고 읊조렸다.
크리스는 한 달 후 하늘병원 문 앞에 서있다. 이름은 큰데 병원이 아담하다. 병원 통유리가 하늘을 비쳐 담고 있어 더 커 보였다. 병원 이름처럼 넓은 마음 탁 트인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여기도 저기도 어딜 가나 전쟁터겠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달라진 자신을 느끼는 크리스였다. 종종걸음으로 회전문을 들어선다. 불안이 가방 무게만큼 함께 있지만 기꺼이 다가가는 마음이 스스로 만족스럽다. 뒤에 경쾌한 버스 경적이 축하해주듯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