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핌 Mar 24. 2022

무슨 일을 하시나요?

My Job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항상 사족을 부치게 된다.


웹디자이너이지만 이런이런 일을 합니다.

경영기획팀 팀장이지만 이런이런 일을 합니다.

온라인사업부이지만 이런이런 일을 합니다.

온라인영업팀이지만 이런이런 일을 합니다.

온라인마케팅 팀장이지만 이런이런 일을 합니다.


왜! 지금의 나는 '마케터'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의 명함에는 '마케팅 팀장'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말 내가 하는 일이 마케팅 일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맞는 말 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정의 내리는 마케팅이라는 것이 모두 다르니 나는 또 사족을 부치는 수밖에 없다.


지금의 대표님은 '우리 마케팅 팀장입니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지만, 대기업 출신이며 벤처사업가로 불리는 대표님의 생각 속 마케팅 업무와 내가 해 왔던 일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무엇일까?

나의 직업은 정확히 무엇일까?



잡코리아의 집무 분류

웹 기획 > 웹 기획 모바일 기획 콘텐츠 기획

웹 마케팅 > 온라인 마케팅 웹 마케팅 소셜마케팅 웹 광고기획 키워드 광고 웹 프로모션

콘텐츠, 사이트 운영 > 쇼핑몰 웹사이트 운영 콘텐츠 관리 게시판 관리 카페 블로그 관리 콘텐츠 개발 콘텐츠 에디터

웹디자인 >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HTML 드림위버 웹퍼블리셔

마케팅 > 마케팅 기획 소셜미디어 브랜딩 키워드 광고 SNS 운영 광고 관리 프로모션 전시기획

사무, 기획, 전략, 경영 > 서비스 기획, 조직관리, 사무관리 문서관리 사무행정 복리후생 관리

영업, 고객상담 판매 매장관리 고객상담 인바운드 > 제품 서비스 영업, 판매관리 재고관리 고객상담 고객응대 CS 인터넷 쇼핑몰

생산, 제조 > 생산관리 품질관리 포장관리



처음 시작은 웹디자인이었다.

의상학과를 졸업했지만, 우연한 기회로 학원에서 html 코딩을 배운 나는 홈페이지를 제작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결 연결되어 홈페이지를 제작해준 사이트의 제품 등록을 위해 상세페이지를 디자인하였고, 사진이 없을 때에는 직접 사진 촬영도 하였으며, 각종 쇼핑몰에 상품을 등록하기도 하였다.

회사에 취업을 하여서는 웹디자이너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오픈마켓과 종합몰들에 입점을 통하여 상품을 판매하며 매출관리와 거래처 관리를 하는 등 MD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력이 쌓이면서는 상품의 이름을 짓고, 로고를 만들고, 광고 카피를 생각해내고, 배너를 디자인하며 이른바 브랜딩 작업도 직접 해야만 했으며, 때로는 제품 제작에 참여하여 아이디어를 내고 실무의 관점에서 패키지 디자인에 도움을 주며 제품 기획과 마케팅 기획을 함께 이끌어 가야만 했었다.

오프라인 매장으로 출고되는 재고 관리와 영업관리 또한 해왔던 일 중 하나이며, 때로는 해외 수출입 업무와 박람회 참여 및 행사부스 진행도 했다.

그러면서도, 고객관리를 위한 카페와 블로그를 운영하였고, 고객 클레임을 처리하고, 택배 송장을 출력하여 포장을 하는 일 역시 나의 일 중에 하나였다.

팀장이 되어서는 직원 관리와, 상담, 직무평가, 인사 및 식사관리까지 모두 챙겼으니 난 몇 가지 일을 했던 것인가!

내 직업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하지 못하고 사족을 부치게 된 내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은가!


디자이너의 길을 놓치고 싶지 않아, 웹디자이너를 뽑는 회사들에만 지원서를 넣었지만 입사 후 내가 하게 되는 일의 결과는 항상 비슷했다. 당시 웹에이전시의 디자이너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작은 회사의 웹디자이너는 모두 겸업인 샘이었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그들과 경쟁을 할 순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주 5일 근무에 야근이 없는 회사만 골라 이력서를 넣었으니, 야근 많기로 소문난 웹에이전시는 내 기준에서 이미 탈락이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상품이 탄생해서 판매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업무가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흘러간다. 마케팅 담당자는 제품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가장 잘 팔릴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실행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 상품의 기획에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고, 제품의 생산과 재고 관리에 관여를 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제품 브랜딩을 위해 디자인을 하고 상품의 광고를 위해 예산을 관리하기도 한다. 판매를 위한 기획안과 콘텐츠 제작에도 투입이 되며 이를 홍보하고 알리는 일련의 과정들 또한 필요하다.


기획에서 배제된 마케터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산이 ₩0인 마케터는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 적일까?
팀장이지만 팀원이 없는 나 홀로 팀을 어떻게 운영해야만 할까?


지금의 회사는 온라인 마케터로 나를 채용하였다. 

무형의 서비스를 홍보하여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과, 어플 가입자를 확보하는 것이 나의 프로젝트였다.

벤처기업을 표방하고 있기에 의례 그렇듯 주어지는 자료와 소스는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이었다.


몇백을 들여 외주로 제작했다는 1페이지짜리 홈페이지를 대표님의 입맛에 맞게 리뉴얼하기 위해서는 1천만 원이 넘는 견적가가 나왔고, 결국 나는 혼자서 회사가 원하는 구성의 홈페이지를 제작하였다.

완성된 홈페이지에 대해 다른 이들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결국 대표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없는 자료를 끌어모아,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 올려도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아니잖아!'라는 대표의 말을 감내해야 한다.


마케팅을 하라고 하지만, 기획에서 배제된 채 상품도 없고 예산도 없이 모호한 무형의 그것을 무슨 수로 홍보를 해야 한단 말인가. 기획서가 무색하게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생겨나기 일수다. 계획 따위를 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기획서를 작성한다고 해도 읽씹이다.


대기업 출신이 아니라서? 명문대 전공자가 아니라서? 

대표의 선배, 후배, 어디 어디 출신, 타이틀이 즐비한 이사 직함의 CXO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경력이 있는 실무자들에 대해 의문과 불신으로 일관하는 사이 직원들 역시 점점 불만이 쌓이며 자신의 역할을 축소해 간다. 현장은 아우성이고 대표는 수익이 안 난다고 하면서도 투자를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

자유롭게 의견을 내라고는 하지만 대표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져 사라진다.

벤처기업의 가장 나쁜 예를 따르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


그렇다고 월급루팡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채팅창에 답변을 달고, 배송 라벨을 출력하고, 제품을 준비한다.

그리고 또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고, 기사를 클립 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다.


오늘의 나의 직업은 'CS담당자 / 콘텐츠 마케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사람에게도 어려운 맞춤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