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다시 시작
2013년 여름밤.
에어컨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댄스바의 열기 속 우리는 서로에게 이끌리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나에게 결혼에 대해 물어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나보다 4살 위였던 오빠는 스스로 '독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독신주의자가 된 사람은 아니었다.
토지 분할 사태가 일단락되고(11화 참조), 제주도의 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오빠와 함께 제주도로 가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결혼의 형식만 빌렸기 때문에 결혼식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결혼식은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하기로 하고, 결혼식이 아닌 함께 제주도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가능한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 작은 컨테이너 주택을 짓고 민박업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완도의 해산물 가득한 한상으로 육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제주행 배에 올랐다.
이렇게 큰 배는 처음이라는 오빠는 약간의 들뜸과 긴장감을 안은채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육지를 떠나는 여운을 오래도록 감상하고 있었다.
함께 하는 제주 여정의 첫 시작이라 생각해서 일까, 제주항에 도착하여 차를 내리는 순간이 왠지 특별하게 다가왔다. 미리 계약한 함덕의 한 달 살기 집에 짐을 풀어놓고 산적해 있는 숙제들은 미뤄둔 채 제주도의 관광지를 돌며 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제주 입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잠시, 며칠 뒤 오빠만을 남겨 둔 채 나는 출근을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바로 퇴사를 할 수 없어 회사일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온전한 이주가 아닌 반쪽짜리 이주였다. 나는 다시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완전한 이주를 위한 준비를 하나씩 마무리해 나갔다.
홀로 제주에 남겨진 오빠는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고군분투 애쓰고 있었다.
함께 살기로 했는데, 그 준비가 우리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D-DAY 11월 28일까지 3개월간 우리는 생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2주에 한번,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제주도에 가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비행기에 올랐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도, 우리는 맛집으로 오름으로 데이트를 하며 여행을 다녔다.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제주공항에서 이별을 할 때면 오빠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곧 다시 보게 될 텐데도 홀로 남겨질 외로움에 우리는 손발 오그라 들도록 유난을 떨었다.
다행히 그 시절의 손발 오그라드는 로맨스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 1편부터 정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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