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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핌 Apr 19. 2022

20. 코로나가 불러온 나비효과

10년간의 제주 이주의 여정, 변화

뭐든 코로나 탓


안정적이고 평범한 일상 속 매일의 출퇴근은 서울의 회사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출근길 도로 위를 횡단하며 차를 막아서는 꿩들과 들판에서 풀을 뜯는 말들을 보며 이곳이 제주도라는 것을 실감할 뿐이었다.


2년 반 동안 교래의 농장으로 출퇴근을 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중 이른바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코로나가 극성일 때도 제주도는 별 타격감 없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국제공항이 폐쇄되며 모든 관광업계가 멈춰 서자 그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코로나 발생자가 0명이라며 자랑스레 말하는 뉴스와, 관광객이 오지 않아 문을 닫는 곳이 많다는 뉴스가 함께 흘러나왔다. 코로나를 가져오는 것은 육지사람이라며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관광업계를 살리기 위해선 문을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다.


우리는 관광업과는 아무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만 하더라도 나에게까지 불똥이 튈 줄은 몰랐다.


얼마 뒤 코로나로 인해 회사 재정이 어려워졌다는 명분으로 제주지사의 직원들을 하나 둘 내보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유료 관광객은 받고 있지도 않았지만 코로나를 구실 삼아 인원을 감축해 나갔고, 나도 그 물결에 휩싸여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백수생활.

집에 홀로 있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마당에 풀을 뽑다 보면 한나절이 흐르고, 반찬 몇 가지 만들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느릿느릿 소소한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시간, 퇴근한 신랑과 함께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잠을 자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늦은 밤 신랑과 함께 안주를 만들어 맥주 한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으로 하루하루 더해지는 야식과 함께 체중도 늘어만 갔다. 


신랑의 일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코로나 시국인지라 외출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만나는 사람은 신랑뿐,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스스로 자가격리 상태가 되어 버렸다.




새로운 터전으로


코로나 사태가 1년이 넘어가자 관광업계는 역전이 되어 있었다.

중국 대상 단체 관광업계는 여전히 휴업 상태였지만, 개별 관광은 훨씬 활성화가 되었던 것이다.

해외로 나가지 못하는 내국인 관광 수요가 제주도에 몰리면서 제주도는 때아닌 관광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주도의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또한 급증하였는데, 그 바람으로 한 해가 다르게 연세가 상승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타운하우스도 일 년 살기를 하러 오는 육지의 사람들로 어느새 단지 절반이 집주인에서 세입자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지속된 코로나 속 집을 가득 채웠던 친구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곰곰이 살펴보다 우리도 연세를 주고 이사를 가기로 결심을 했다.


연세는 내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가버렸다.


결혼을 하고 7년간, 제주의 중산간 마을 단독주택만 경험했으니 이참에 배달이 되는 시내 아파트로 이사 가자며 우리는 배달앱을 써볼 마음에 들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시내 아파트들을 둘러보면서 역세권 편세권 배민권은 이미 우리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구나를 깨달았다. 시골의 한적하고 공기 좋은 주택환경에 익숙해진 우리는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의 혼잡함에 가슴이 탁 막혀오는 갑갑함을 느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둘 다 동시에 도심 아파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원래 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한 동에 8세대가 전부인 작은 단지의 리조트형 아파트를 골라 이사를 갔다.

입구에 들어서면 야자나무가 있고,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5분이면 바다를 갈 수 있는 곳, 버스 정류장도 가깝고 무엇보다 배달이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랑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던 코로나로 인해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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