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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앤글 Nov 03. 2023

새우껍질 까 주는 남자


새우는 맛있다. 쪄서 먹어도, 구워 먹어도, 삶아 먹어도 맛있다. 양념 옷을 입어도 변함이 없다.

요리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본연이 맛있는 아이다. 바다에서 왔지만 고소한 녀석이다. 맛있는 건 착하다. 새우는 누가머래도 착한 아이다.


새우는 맛있지만 새우껍질을 벗겨 먹는 수고로움은 없다. 오동통하고 뽀얀 새우 속살만 맛있게 먹으면 그뿐이다. 이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나에게 새우껍질 까 주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 1월 이 남자를 만났으니까 자그마치 15년 동안 새우껍질을 까 본 적이 없다.

그이와 함께 언제 처음 새우를 먹었는지, 그이가 언제부터 새우껍질을 까주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내 그릇 앞에 쌓이는 뽀얗고 통통한 새우살을 맛있게 먹은 기억만 남아있다.


"왜 이렇게 새우껍질을 까 주는 거야~?" 통통한 새우 하나를 시원한 사이다에 퐁당 담갔다 꿔내 먹으며 콧평수를 넓혀본다. 초장을 찍어먹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다. 초장이 새우 본연의 맛을 해치는 게 싫다. 고소한 새우의 본질과 톡 쏘는 달큼한 사이다가 만나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있다.

"껍질 까다 손 다쳐. 비린내도 나고, 당신은 맛있게 먹기만 해" 은근 저기압인 요즘에도 새우껍질은 잘 까주고 있다. 평상시처럼 "사랑해"를 달고 살지 않아도 새우에서 사랑을 느낀다.



뷔페에서 새우까기 바쁜 손




"당신은 꼭 그러더라. 짜증 나!"

여느 부부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주 굵직한 사건이 아니고서야 시간이 지나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주제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도 짜증 난다는 한마디 남기고 씩씩거리며 화장실에 다녀왔다. '꼴 보기 싫어 이건 투명인간 3일짜리야'를 곱씹으며 자리에 돌아왔는데 깨끗한 사이다 한 컵과 오동통한 새우가 그릇에 수북이 쌓여있다.


그이는 새우 껍질을 깜으로써 사과했고 나는 새우를 사이다에 퐁당 빠뜨리면서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투명인간은 사라졌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껍질 벗은 새우에서 행복을 찾았다.

나는 새우껍질 까 주는 남자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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