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유부녀의 두 번째 사랑

by 라라앤글

"엄마, 정말 작가 되는 거예요? 그럼 마법천자문 같은 만화책 써 주세요"

"엄마 나는 이쁜 동화책이요"

"소설을 써. 소설!"


또래 친구들이 즐겨보는 마법천자문 같은 만화책이 "우리 엄마가 쓴 거다" 자랑하고 싶은 1호. 이쁜 공주가 되어 멋진 왕자님과 사랑에 빠지는 행복한 주인공을 꿈꾸는 2호. 김은희 작가의 카드를 쓰고 산다는 장항준감독의 삶을 꿈꾸는 남편까지. 매일 무언가를 쓴다고 고심하고 있는 초보작가의 모습을 곁눈질하던 가족은 이제 저마다의 꿈으로 엄마와 아내를 응원하고 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가고, 아이들 공부도 잘 시키면서 정서적 돌봄마저 끝내주게 해 내는 완벽한 현모양처의 삶을 꿈꾸었다. 간혹 문화센터에서 꽃꽂이도 배우고, 붓글씨도 쓰며 오후의 차 한 잔이 함께 하는 우아한 여인의 삶 말이다.

꿈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결혼 14년 차. 아등바등 먹고살기 바쁜 맞벌이 부부이자 치열한 워킹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눈 뜨면 회사로 출근, 업무 마치면 집으로 출근, 잠자리에 드는 것이 유일한 퇴근인 무미건조한 삶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독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정도랄까? 책 마저 읽지 않는다면 내 삶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불안함에 꾸준히 그리고 끊임없이 독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매일밤 뜨거워지는 열녀가 되어 그나마 잠들지 못하던 밤이 더 길어졌다. 나는 뭐 하며 사는 걸까? 내 50 이후는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제2의 사춘기가 던져주는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즈음 우연히 글쓰기라는 새로운 세계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갱년기가 던져 주는 고민이 고마웠던 순간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료한 일상에서 글쓰기가 가능할까? 무엇을 써야 할까? 나의 일기가 글이 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글을 쓰기 시작하자 늙은 고양이처럼 나른하던 삶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누군가 36색 수채화 물감으로 내 삶을 색칠하는 듯하다. 모아나가 테카의 가슴에 테피티의 심장을 넣자 잿빛 섬이 아름다운 봄으로 물들었던 것처럼.


영화 <모아나> - 봄으로 물드는 테피티섬




present. 오늘이고 선물이다. 오늘이 곧 글감이 되는 선물 같은 하루가 주어지고 있다.

2호가 쏟아버린 짜증 나던 우유도 글감이고, 사춘기 아들의 소소한 반항도 글감이다. 집안에서 뒹구는 머리카락도 소재가 되고 지긋지긋하게 싸우던 남편과의 일상도 글의 주제가 되어 버렸다.

글로 쓰지 않는다면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이고 찰나에 사라져 버릴 순간이다. 글을 쓰려고 돌아보니 재목(材木)이 아닌 게 없다. 이 보석상자 같은 삶 속에서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걸까. 이제 이 보석을 바구니에 담아야겠다. 실로 꿰어 목걸이도 만들고 귀걸이도 만들어 봐야겠다. 오늘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글쓰기 재밌어? 당신 요즘 활력이 넘치네. 좋아 보여~"

"어, 좀 그래 보이지? 글쓰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네."

본인을 향하던 짜증도 줄어들고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아내가 기특한 듯, 부러운 듯 바라보는 남편의 참견이 기분 나쁘지 않다. 카톡을 하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귀에 걸리는 입가가 쉬 내려오질 않는다.


동기 작가들과의 수다 속에 고민과 위로가 있고 재치가 있으며 샘솟는 소재가 있다. 그들과의 소통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아내가 바람난 건 아닌지 슬며시 훔쳐보는 카톡도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다.

아이들에게도 한껏 부드러운 엄마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글 쓰는 엄마=짜증 공식을 심어줬다간 글 쓰는 엄마를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온화하게 글 쓰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삑삑이 걸음마 신발을 신고 신나게 세상을 맛보는 돌쟁이 아가처럼 글쓰기의 신세계로 와다다다 발걸음을 내딛는다. 미처 몰랐다. 글쓰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내 글에 만족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어차피 최초의, 최고의, 최후의 독자는 나 자신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꾸준히 써 보려 한다.


"자기 나 사랑해?" 자주 묻는 애교 많은 남편에게 대답 한번 시원하게 해 주지 않는 무뚝뚝한 아내지만 새로이 시작된 이 설렘만은 감출 수가 없다.


여보 미안해,

나 아무래도 글쓰기와 사랑에 빠진 거 같아.



대문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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