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오후 2시에 골라먹는 이야기
재활용 쓰레기를 대하는 자세
택배상자는 펼쳐주세요
by
라라앤글
Nov 6. 2023
누군가 택배 내용물을 꺼내고 상자를 저렇게 버렸다.
나는 못 본 거다.
사무실 입구 재활용 쓰레기통 옆에 방치된 택배상자.
자꾸 내 눈에 띄지 마라. 나는 못 본 거다.
왜 하필 정수기는 그 옆에 있는가. 물 마시러 가니 또 눈에 들어온다. 너 왜 나꾸 내 눈에 띄니?
나는 사무실 직원이다. 이곳에서 나는 주부가 아니다.
택배 상자를 펴서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하고 싶은 건 내가 주부인 탓일까?
나는 못 본 거다.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본 적이 없다.
택배상자를 저렇게 버렸다간 빌라 공동밴드에 대번에 사진이 올라온다.
"몇 호인가요? 박스는 똑바로 펼쳐서 버려주세요!"
누구에게 책 잡힐까 집으로 오는 택배박스는 부지런히 분해해서 깔끔하게 내놓았다. 나는 주부니까.
하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다. 사무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못 본 거다. 내가 버린 거 아니다.
버린 그녀에게 박스는 똑바로 펼쳐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의 상사니까.
그녀에게는 주부 본능이 없는 것일까?
사무실 공용 택배이니 박스를 정리하는 건 풀어헤친 그녀의 몫이 아닌가?
내일 아침 청소여사님이 쭈그려 앉아 저 택배 상자를 분해할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저건 내가 버린 택배상자다. 분해를 해야겠다.
아침에 이 빌딩 전체의 쓰레기통을 비우실 여사님의 일손을 덜어드리자. 그래 난 지금 주부다.
택배상자를 분해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제발
택배상자는 잘 펼쳐서 버려주세요. 분해되지 않은 택배상자는 보기 불편합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keyword
택배상자
재활용
에세이
63
댓글
16
댓글
16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라라앤글
라이프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행복합니다. 인스타그램 에서 읽고 쓰는 북스타그램 라라앤글을 운영중입니다.
구독자
530
제안하기
구독
매거진의 이전글
10월 31일 그리고 잊혀진 계절
마라맛 시어머니는 아닙니다만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