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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앤글 Nov 06. 2023

재활용 쓰레기를 대하는 자세

택배상자는 펼쳐주세요


누군가 택배 내용물을 꺼내고 상자를 저렇게 버렸다.

나는 못 본 거다.


사무실 입구 재활용 쓰레기통 옆에 방치된 택배상자.

자꾸 내 눈에 띄지 마라. 나는 못 본 거다.


왜 하필 정수기는 그 옆에 있는가. 물 마시러 가니 또 눈에 들어온다. 너 왜 나꾸 내 눈에 띄니?


나는 사무실 직원이다. 이곳에서 나는 주부가 아니다.

택배 상자를 펴서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하고 싶은 건 내가 주부인 일까?

나는 못 본 거다.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본 적이 없다.


택배상자를 저렇게 버렸다간 빌라 공동밴드에 대번에 사진이 올라온다.

"몇 호인가요? 박스는 똑바로 펼쳐서 버려주세요!"

누구에게 책 잡힐까 집으로 오는 택배박스는 부지런히 분해해서 깔끔하게 내놓았다. 나는 주부니까.


하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다. 사무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못 본 거다. 내가 버린 거 아니다.

버린 그녀에게 박스는 똑바로 펼쳐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의 상사니까. 그녀에게는 주부 본능이 없는 것일까? 사무실 공용 택배이니 박스를 정리하는 건 풀어헤친 그녀의 몫이 아닌가?


내일 아침 청소여사님이 쭈그려 앉아 저 택배 상자를 분해할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저건 내가 버린 택배상자다. 분해를 해야겠다. 아침에 이 빌딩 전체의 쓰레기통을 비우실 여사님의 일손을 덜어드리자. 그래 난 지금 주부다.


택배상자를 분해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제발 택배상자는 잘 펼쳐서 버려주세요. 분해되지 않은 택배상자는 보기 불편합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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