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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앤글 Nov 20. 2023

1988년, 선생님의 손 편지

1986년 국민(초등) 학교 2학년 2학기. 배가 남산만 하던 담임선생님 대신 젊고 어여쁜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아마도 담임선생님은 출산휴가를 가셨나 보다.

"차렷, 경례!" 어색하지만 새로운 선생님을 향해 인사 구호를 외쳤다. 여느 여자어른 보다 키가 크신 선생님은 예상과는 다르게 호탕한 웃음소리에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반장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큰소리로 인사를 잘해서인지 여러 선생님들께 이쁨도 많이 받았다.


2학년 2학기도 마무리가 되었고 추운 겨울이 찾아왔다.

"OO야, 이번 주말에 선생님이랑 세종문화회관에 가지 않을래? 어머니께는 선생님이 여쭤볼게."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곳도 처음 들어봤고,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 이뻐하는 선생님이 어딘가를 가자고 하셔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흔쾌히 허락을 하셨고 나는 선생님과의 데이트에 들떠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어느 주말 명동. 형형색색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 그리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있는 나는 별천지에 온듯했다. TV에서만 보던 세상 속에 내가 들어와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네 가지 파스텔 색상이 들어가 있는 따뜻한 벙어리장갑을 선물해 주셨다. 얼어있는 나의 손에 손수 장갑을 끼워 주셨다. 나는 그 당시 즐겨 던 동화책 속 소공녀 세라가 된듯한 기분이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크리스마스기념 어린이합창제가 열렸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천상의 하모니에 빠져 꿈을 꾸는 듯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를 선물하셨다.


3학년이 되어서도 가끔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계신 교실로 놀러 가곤 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이뻐하셨고 3학년 담임선생님은 반장이 자꾸 다른 교실로 간다고 장난스레 내 머리에 꿀밤을 주시기도 했다.

어느덧 3학년도 마무리가 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1988년 1월 겨울방학. 선생님의 당직날에 맞춰 학교를 방문했다. 교무실 연탄난로에 마주 앉아 엄마가 싸 주신 귤을 까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OO야, 선생님 교실에 새로운 책을 많이 가져다 놨어. 가서 읽고 싶은 책 골라와." 집으로 가기 전 선생님은 나에게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교실로 가서 반짝반짝 자태를 뽐내고 있는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담았다.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새 학기에 학교에서 다시 만나자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 엄마! 이게 뭐지?"

"선생님 편지네. 직접 주신 거 아니야?"

선생님은 나에게 편지를 직접 건네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편지는 내가 좋아하는 소공녀 동화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선생님도 편지를 직접 건네주기 부끄러우셨던 걸까? 소공녀 사이에 편지를 끼워 놓으신 선생님의 소녀 같은 모습에 비밀 친구가 생긴 듯하여 기뻤다.


확대해서 편지 읽기


당시에는 선생님의 편지 내용이 다소 어려웠다. 3학년 소녀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나를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선생님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소중히 간직했다.

지금처럼 SNS가 발달했던 시절도 아니고, 연락수단 이라고는 편지와 집 전화밖에 없었기 때문에 4학년 때 전학을 간 나와 선생님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어찌 선생님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선생님과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나는 처음 만났을 때의 선생님 나이보다 훌쩍 큰 어른이 되었다.


결혼할 때 과거 남자 친구와의 연애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친구들과의 편지까지 모든 편지를 다 폐기처분했다. 딱 하나 선생님께 받은 편지만이 나의 신혼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편지를 자주 꺼내 읽었음에도 보관을 잘해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상태가 좋은 편이다.


몇 년 전 스승의 날 즈음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을 인스타그램에 편지 사진과 함께 올렸다. 교육청에 선생님 찾기가 가능하니 연락해 보라는 댓글을 봤다. 왜 그동안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나는 당장 용기를 내서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1986년부터 서울 OO동 OO초등학교에 근무하셨던 OOO 선생님을 찾고 싶은데요." 나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꼭 선생님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락을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드디어 선생님의 연락처가 도착했다. 아직도 서울 어딘가 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신 걸 확인했다. 너무나 떨려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려 인사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용기를 내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물론 선생님은 내가 누군지 정확히 기억은 하지 못하셨지만 세종문화회관에 갔던 일과 편지 이야기를 전해 드렸더니 조금은 기억이 나신다 하셨다.

"내가 선생님이 되는 데 있어 첫 기쁨을 준 제자가 너였구나." 선생님의 그 말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선생님 늦게 연락드려 죄송해요." 선생님과 오랜만에 추억을 더듬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서로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선생님께 받은 편지와 그 당시 나의 사진을 보내 드렸고 선생님은 옆에 찰싹 붙어 뾰로통하게 있는 내 모습이 담긴 선생님의 결혼식 사진을 보내 주셨다. 담임을 맡고 계신 6학년 언니오빠들 사이에서도 기어코 선생님 옆을 차지했었나 보다. 나의 선생님을 빼앗기는 거 같아서 심통이 났었나? 나에게 없던 과거의 사진을 보니 반가웠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한번 만나자 하셨는데 아직도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사는 게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함에 죄송한 마음 가득이지만 조만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만나 봬야겠다.






예전에는 교사라는 이름의 권력을 가지고 학생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던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고, 요즘에는 예의 없는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교권이 침해되어 가슴 아픈 선택을 하는 선생님들의 뉴스도 종종 접하게 된다.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사회의 잇슈이다.

어릴 때 선생님과의 관계는 부모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아이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보듬어 주시는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건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뉴스에 비해 크게 잇슈화 되지 못해 안타깝다.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 하나에 사랑을 배우고 바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다. 분명히 그 사랑을 추억하며 바른 어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선생님과 학생에 관한 나쁜 뉴스보다, 선생님과 학생에 관한 좋은 뉴스가 더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을 만난 지 40년이 다 되어 간다.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이 몇 분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써서 몰래 주신 선생님이 나의 첫 번째 선생님이시다. 오늘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써야겠다. 35년 만에 쓰는 늦은 답장이 될 것 같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의 저를 추억할 수 있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와 귀한 편지를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선생님의 사랑을 추억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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