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앤글 Nov 22. 2023

너는 할 말 다해서 속이 시원하냐?

월말이 다가온다. 왜 매달 말일 즈음에는 할 일이 쌓이는지 모르겠다.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을 다 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일에는 모래시계처럼 일이 더 쌓인다.

업무특성상 숫자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업무 조회뿐만 아니라 일 처리 과정에서 늘 숫자를 두드리다 보니 숫자 한 자리만 틀려도 조회가 안되고 처리가 안되고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모니터에 업무요청 쪽지가 스무 개쯤 쌓여 있다. 순차대로 하나하나 일 처리를 하고 있는 중에 제대로 업무요청을 하지 않은 사람이 지나간다. "이거 확인해 주셔야 해요~" 바쁜 와중에도 요청건을 처리해 드리기 위해 말씀드렸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처리 해 주던 거 왜 안 해줘? 왜 내 눈을 보고 얘기하지 않아?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얼굴 보고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일이 너무 많아서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요청건은 정확하게 주셔야지, 다 확인을 안 해 주시면 제가 일일이 조회를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일처리가 지연돼요. OOO님은 한분이시지만 저는 수십 명의 요청을 받아서 일을 처리하고 있어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씀드렸다. 일단 상대에게 말할 때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좋은 단어를 골라 예의 있게 말하는 게 익숙해진 삶이다. 일단 사과는 드렸는데 영 개운치가 않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승범이 말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한번 더 수고하고 말지 했던 나의 호의가 그 사람의 당당한 권리가 되어 버렸다. 호의 호의 나는 둘리가 되었다.


잘못된 업무요청을 한 사람은 하고 싶은 말까지 하고도 당당하다. 정확한 업무요청을 한 나는 갑자기 해주던 일을 안 해 주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당한 요청을 했을 뿐임에도 그 사람의 말 때문에 영 기분이 찝찝하다.

내 실수 하나에 큰 사고가 발생하는 업무인데 하던 일을 올 스톱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더 예의 바르게 요청했어야 했나? 나만 뒤끝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저 사람처럼 요구사항을 당당하고 시원하게 말해버렸다면 내 속이 이리 시끄럽지 않을까? 나는 왜 해야 할 말 보다 내가 할 말에 대하여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 그 생각부터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일로 만난 사람 중에도 분명 좋은 사람들이 있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업무협조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더 나아가 심적으로 가까워지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기에 관계중심적인 나는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내 일이 아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빨리 처리하는 편이다. 아이들 저녁을 챙겨야 하는 워킹맘이기에 최대한 퇴근 시간까지 빠르고 정확한 업무처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의 바뀐 헤어스타일도 칭찬하고, 아픈 곳을 괜찮아졌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피기도 한다. 모든 요청에 웃으며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는 나의 삶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괜한 호의를 베풀었어. 나는 왜 정당한 요청을 하고도 기분 나쁜 말을 들어야 할까?' 점심 혼밥메뉴로 고른 고구마돈가스 마저 달달하지 않다.




자기 할 말 시원하게 다하고 뒤끝 없이 깨끗한 사람이다 자처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감정은 안중에 없는 것일까? 상대의 감정은 어찌 돼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저 다 털어낸 자기감정만 소중한 것일까?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나는 그 감정이 그저 궁금할 뿐이다.


말 한마디 하기 전에 듣는 사람의 입장과 감정을 고려하여 말하느라 내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고려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뭘까? 사람은 다 각자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니까 누가 옳다 나쁘다 논하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나도 내 감정을 우선시해서 속 시원히 말하고 뒤끝이 없다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평생 그러지 못할 것을 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난 건지, 학습된 태도인지 나조차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듯 나 또한 이런 사람이다.




휴~ 크게 한숨 쉬고 나의 페이스를 찾자! 내 삶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내 기분이 나빠지는 건 나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나의 감정 그릇에 나쁜 말이 들어왔다고 해서 젓가락으로 그 감정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내 감정그릇의 물만 더 흐릴 뿐이다. 좋은 글, 좋은 영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좋은 대화를 통해 내 감정그릇을 채워야겠다. 나쁜 감정은 알아서 떠밀려 나갈 것이다.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도 내가 사랑해줘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기가 싫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그 감정이 나는 싫다.

평화가 좋고, 평화로운 일상이 좋고, 평화로운 관계가 좋다. 내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 사람의 말은 잊어버리고 내 할 일을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1988년, 선생님의 손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