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이 Jan 19. 2022

덕통사고

어느날 갑자기

적지 않은 나이에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일명 덕통사고!

덕질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덕질의 세계에서는 덕통사고라고 말한다.

이건 사고가 확실하다.

예측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고, 느닷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니까.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인연?

뭐든 갑자기 순식간에 번개처럼 일어나는 일.

마치 누군가에게 한 눈에 반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덕질러들의 덕질은 이처럼 사고처럼 어느날 갑자기 번쩍! 시작된다.


'어느날 갑자기'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영화나 문학에서 '어느날 갑자기'가 나타나면 그건 바로 사건이 터지는 지점이고,

그동안 쌓여가던, 고여가던 것들이 점화되어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관객들의, 독자들의 몸이 앞으로 기울고 집중하며 빠져들어 가는 시점이다.


덕통사고가 일어난 그 지점이 어디였을까?

대부분의 덕질러들에게 그 지점이 비슷하다는 점이 신기하다.

그 순간, 덕질 대상은 뭔가 강렬한 에너지파를 발산했고, 그 에너지파와 같은 주파수를 품은

수많은 덕질러들은 번개를 맞는 것처럼 동시에 쾅! 하고 충격을 받는 것일까?


유리겔라라는 마술사가 텔레비전에 등장해서 수저를 구부리는 묘기를 부렸을 때

수많은 아이들은 화면에 딱 붙어서 눈이 동그래졌고, 그 이후 내내 수저를 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유리겔라는 무슨 마법의 파장을 보내는 것처럼 묘한 몸짓을 했고,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누구는 수저를 구부렸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했고, 내 수저는 언제쯤 구부러질 수 있을까

있는 힘을 다해 흔들다 흔들다 온 힘을 다해 수저를 구부리려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수저를 눌러보기도 했었다.


우리의 덕질 대상들도 어쩌면 그처럼 화면을 통해 신묘한 어떤 전파를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매혹시키고 빠져들게 만들고 사로잡는 무엇으로...


양준일은 슈가맨을 통해 재데뷔했다. 20여년 전 세 번째 앨범을 내고 사라졌던 그를,

플로리다에서 서빙을 하며 아내와 아들과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그를  대중들은 다시 찾아냈다.

그즈음 유튜브에서는 '온라인 탑골 공원'이라는 타이틀로 90년대 가수들의 영상을 복원하여

진열했고,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가수는 양준일이었다.

그는 '탑골 GD'란 별명을 얻으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유튜브에 떠도는 예전 영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를 궁금해했고 그리워했다.

댓글들에는 30년전 가수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회전문에 갇혀 나갈 수 없다고 호소하는 댓글들도 넘쳐났다.

그곳에서부터 크고 작은 덕통사고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JTBC '슈가맨'의 무대에 섰다.

연이어 같은 방송국의 '뉴스룸'이라는 프로에 출연했는데

대부분의 양준일 덕질러들은 슈가맨 혹은 뉴스룸에서 그를 보고 덕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나 역시 뉴스룸을 통해 덕통사고를 당했다.


어떤 모습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양준일의 영혼의 파장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외면의 투명함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가식과 꾸며짐과 만들어진 이미지와 대본과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텔레비전의 연예인들의

모습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신기했다. 그저 신기하고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유리겔라를 보듯 몸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들어갈 듯 가까이 갔고, 눈은 점점 커졌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완벽한 덕통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양준일 그리고 양준일이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