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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Jan 25. 2022

안티의 기원

질투는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아 내용은 모르겠지만 참 와닿는 말이다. 글을 쓰면서 이 힘을 더 자주 느끼곤 한다. 함께 글 쓰기를 시작했던 동료들이 혹은 후배들이 먼저 빠르게 많이 더 잘 쓰고, 문단에 먼저 나가고, 더 많은 책을 내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이 팔리고, 더 많이 주목 받는 모습을 보면 질투심이 생긴다.


나도 잘 하고 싶은데,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나도 더 잘 할 수 있는데... 재능이나 실력이나 노력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반응이나 결과를 더 부러워하다 보면 질투심이 생긴다. 잘 된 모습 이면의 모습을 안다면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질투심이다.


그럴 땐 차라리 재능이나 노력을 질투하는 게 낫다. 재능은 타고난 거니 아무리 부러워해도 따라갈 수 없어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래. 너는 타고났구나. 좋겠다... 그리고 노력을 질투하는 건 아주 바람직하다.

하루에 열 시간을 썼대. 그래? 그럼 나는 열두 시간을 쓰겠어, 라든가, 한 달 동안 500매를 썼대. 그래? 그럼 나는 700매를 쓰겠어... 라든가.

질투가 생길 때, 그것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질투는 나의 힘'이 될 수 있다.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대중의 인기를 얻는 수많은 스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안티와 악플. 인기를 얻고 사랑을 받는 만큼 그들에게는 뜬소문과 악의적인 소문들이 따라온다. 웬만큼 멘털이 강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겨내기 힘든가 보다. 안티와 악플로 인해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일들도 비일비재하니까 말이다.


연예인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인기인들도, 그리고 심지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돈을 잘 벌어서, 너무 예쁘고 잘 생겨서, 행복해 보여서, 재능이 뛰어나서, 잘 나가서... 미워 죽겠어. 망하게 만들 거야. 이건 꼭 길 가다가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여서 칼로 찔렀다는 범죄자의 말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양준일도 재데뷔 이후 내내 안티와 악플러들이 따라다니고 있다. 음반 발매를 앞두고, 광고를 앞두고, 콘서트를 앞두고 있을 때 꼭 그들은 발악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갑작스러운 인기를 얻은 스타들의 안티들의 특징이 비슷하다는 점도, 반복되는 점도 좀 신기하다. 한때 좋아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밀려나거나 인정받지 못한 그들은 안티로 전락하여 좋아했던 스타를 잡아내리려고 애를 쓴다.

내가 띄웠으니 내가 끌어내리겠어! 그렇게 말하는 안티들도 있다. 자기들이 무슨 대중예술계를 좌지우지하는 신의 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안티는 영어 단어의 '반대되는' 이라는 접두사이다.

희곡 문학 이론에서는 안타고니스트란 말이 있다. 프로타고니스트는 욕망을 가진 주체 곧 주인공을 말하고, 안타고니스트는 그런 주인공을 반대하고 끌어내리고 방해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적대자를 말하다.

나는 안티를 말할 때면 종종 안타고니스트를 떠올린다. 사실 극에서 안타고니스트가 없으면 이야기는 굴러가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야만 사건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것과 싸우고 이겨내어 원하는 것을 획득하고, 영웅이 된다.

슬프지만 주인공은 안티와 함께 가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나는 안티의 기원을 신약성서의 예수에게서 떠올려본다. 예수야말로 그 당시 슈퍼스타였다. 신의 아들이자, 병든 자를 고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했다. 구름 떼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생겼고, 멀리서나마 그를 보려고 몰려들었고, 그의 신성한 옷 한 자락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얼마나 만나기 힘들면 예수가 설교하는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환자를 들것에 실려 내려보내 한 번이라도 만져달라고 애원했을까...

차별과 소외받던 창녀들, 세리들, 타민족인들...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주고, 엄격하고 잘못된 규칙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분.


하지만 그는 자기를 따르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롯유다에게 배신을 당한다. 가장 가깝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안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다는 예수를 황금 몇 덩이에 팔았고, 결국 그렇게 추앙받고 사랑받던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창에 찔려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게 된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졸지에 다 사라졌고 몇몇 여인들만이 마지막까지 예수 곁을 지킨다.

심지어는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마저 예수가 죽던 날 자기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며 도망간다.

수천 년 전의 유다야말로 기록으로 남아있는, 안티의 기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티와 악플이, 그리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근거 없는 기사를 받아쓰기하는 쓰레기 기자들이  용기내어 새로운 걸음을 내딛으려는 양준일의 발목을 잡을 때마다 나는 감히 예수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안티는그때부터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테니까.


누군가의 행복과 꿈을 위해 함께 힘을 합치고 응원하는 일이 누군가의 불행과 꿈의 좌절을 위해 힘을 쏟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이 아닌가.  


내가 가진 힘과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

연예인 걱정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란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연예인을 질투하는 것이 제일 쓸데없는 질투이다.

'질투는 나의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애를 쓰고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탁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는지 보면 된다.


나를 돌아보는 일이 목표가 된다면 우리는 덕질로 인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니 있는 힘껏 덕질을 하자.

그리고 있는 힘껏 질투를 하자.

무대 뒤에서 흘리는 그들의 눈물과 땀을 질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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