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를 배울 때 한글 프로그램이랑 같이 딸려 있는 게임을 열심히 했다. 글자가 뚝뚝 떨어지는 걸 하나씩 눌러서 없애는 게임.
단순한 게임이지만 생각보다 꽤 긴장감과 스릴이 있었고, 그 게임은 자판을 익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다.
그때는 한글 프로그램 자격증이 있었고(지금도 있나? 확인 안 해봄) 덕분에 2급 자격증을 획득했고, 그걸로 취업을 할 수 있었고, 한글 프로그램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키보드를 칠 때는 종종 피아니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키보드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들렸고 리듬을 타고 속도를 높이면 자판 치는 것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거의 모든 글 쓰기와 모든 생각을 손가락으로, 자판을 통해서 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도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정리가 되고, 다양한 감정들도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에 토해 놓고 가다듬는다. 키보드를 두드려 소통을 하고 대화를 하고 일을 한다.
자유자재로 키보드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습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키보드가 마치 나의 다른 손가락인 것처럼, 아니, 다른 두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키보드를 칠 땐 키보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키보드라는 틀 안에서 나는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틀 안에 있어야 자유롭다"라고 양준일은 말한다. 양준일은 이론이나 생각이 아닌,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어 보고 깨달은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put it to the test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나 뜻은 책에 박제되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는 한 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고, 한 마디도 대충 하지 않는다.
그래서 팬들은 그의 말에, 글에, 표정에 눈과 귀를 쫑긋 세운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도,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양준일이 그의 인스타나 유튜브나 굿즈 등에 쓰는 쉼표, 마침표, 대문자, 소문자, 띄어쓰기, 행갈이 등... 팬들은 그의 숨소리 하나도, 글자 획 하나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첫 앨범에서 '가나다라마바사'란 노래에 암호 말로 비밀리에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뤘고, 2년 전 재데뷔 후 처음 낸 책 'Maybe' 역시 부제가 '너와 나의 암호 말'인 것처럼 양준일은 암호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한다.
두 나라를 오가며 자란 양준일에게 영어도 한국말도 암호로 들렸을 것이다. 표면상의 의미와 숨겨진 의미가 다른 문화적 언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힘들었던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암호를 좋아하는 양준일과 양준일 팬들은 숨겨진 암호를 주고받으며 예민하고 세심하고 꼼꼼하게 소통한다.
나는 요즘 이런 덕질이라면 꽤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 성향에 잘 맞으니까.
양준일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훈련과 연습으로 기본적인 기술을 익혀야만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가능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동양인으로 차별받고 무시당하던 양준일은 청소년기부터 춤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춤 덕분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러면서 차별이나 무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디오를 보고 연습을 하기도 하고, 춤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그의 경험 때문에 그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유'라고 하면 갑갑한 틀에서 벗어나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닐 때 항상 자유를 꿈꿨다.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이런 압박과 틀에서 벗어난다면 훨씬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상상했다.
가족, 집,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 심지어는 중력에 의해 발이 붙어 있는 이 지구를 떠나야만 진짜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키보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에 화면에 떠오르는 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바깥의 틀도 있지만 내 안에도 틀이 있다. 나는 나의 틀의 크기와 재질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양준일의 틀의 크기와 재질에 대해서도 함께...
양준일은 공간을 비유로 쓰기도 한다.(그는 비유로 말하는 걸 좋아한다. 그건 14년 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 때문이리라... 이 이야기는 다음에) 가족을 잠수함이나 정원에 비유하기도 하고, 팬들을 땅이나 부동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유를 쓰길 좋아한다는 점도 나랑 비슷?(공통점을 찾을 때마다 친해지는 느낌이다^^)
틀이 비유지만 틀을 또 다른 비유로 생각해 보자면... 이건 비유의 비유?
나의 틀은 얄팍한 실리콘 재질인 것 같다. 가끔 날이 따뜻할 때만 부드러워지고 늘어나지만 갑작스러운 추위가 오면 금세 딱딱해지는...
양준일의 틀은 부드럽고 폭신한 캐시미어 재질일 것 같다. 쭉 늘어나기도 하고, 무엇을 담아도 담긴 것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색상도 예쁘고 고가인 고급 실?(내가 뜨개질을 좋아하는 관계로) 하지만 다루기 쉽지 않고 연약하기에 조심해야 하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노래하고 춤출 때 그가 서 있는 무대라는 틀이 한없이 늘어나고 확장되어 객석의 팬들까지 감싸안는 그 광경이 매번 놀라울 뿐이다.
양준일을 덕질하면서 그의 아름답고 선한 틀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 틀 안에서 나는 행복이라는 자유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