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열심히 일기를 썼다, 숙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 읽는 걸 좋아했고 글 쓰는 걸 즐겨했고 그래서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기만 해서는 별 도움이 안 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면 글 쓰기는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누구든 내 글을 원하고, 글 값을 준다면 기꺼이 즐거이 글을 쓰고, 그렇게 입금된 돈을 볼 때면 여전히 신기하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 내 맘대로 쓰는 글이 더 즐겁다. 이곳에 쓰는 글은 어쩌면 내맘대로 일기의 확장판 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능한 매일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열심히 일기를 썼다. 일기뿐 아니라 소설도 끄적였고, 시도 끄적였고, 동화도 끄적였고, 편지는 매우 열심히 끄적였다.
그런데 내가 쓴 일기를 읽어보면 비슷하게 끝이 나곤 했다. 이러이러한 하루를 보냈다. 후회되고 반성한다.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매번 같은 패턴의 글이 지겨웠다. 아니, 같은 후회와 반성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절대로 지나간 일은 돌아보고 후회하지 않겠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기특하고 현명한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잘했어! 토닥토닥.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는 걸 무척 좋아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와 좌절 끝에 알게 되었다. 나는 계획적인 인간이 아님을... 그리고 세상은 계획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양준일이 마지막 가수 생활을 한 지 20여 년 만에 '슈가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들은 그를 궁금해했고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슈가맨'은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과거에 인기 있던 가수들을 불러내서 그들의 근황을 듣고 예전 노래를 다시 선보이는 프로그램이었다.
슈가맨을 통해 소환된 가수들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중장년층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과거 함께 파릇파릇한 청춘을 보냈던 스타들의 나이 들고 변한 혹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프로그램에 양준일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과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과거의 모습을 잊게 할 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준일이 슈가맨에서 했던 말은 팬들에게는 덕질의 세계로 빠지게 만든 마법 같은 주문이었다. 20대의 양준일에게 영상편지를 쓰라는 사회자의 요구에 양준일은 "지금 네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완벽'이란 말에 대한 해석을 달리 했다. 다시 가수가 되어 성공할 것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그때 이루지 못한 꿈이 다시 이루어지는 걸 말하는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완벽한 집에 완벽한 가족에 완벽한 차에 완벽한 잔고를 갖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일은 그 뒤 다른 인터뷰에서 여러 번 완벽에 대해서 말했다. 완벽이란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다 같은 곳(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고...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러니 욕심과 꿈을 내려놓으라고...
그는 이 말을 할 때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 같이 보였다. 산신령이나 도인 혹은 철학자나 오랫동안 도를 닦고 수련을 하여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 같은 그런...
과거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더 좋아한다. 그는 삶의 목표 지점을 볼 줄 안다. 그렇기에 그곳까지 가는 길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양준일 덕질러들은 말한다. 우리가 가수를 좋아하는 거냐 아니면 철학자를 좋아하는 거냐... 우리가 좋아하는 양준일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양준일이 막 활동을 시작한 뒤 코로나도 활동을 시작했고, 운이 없게도 코로나로 인해 여러 번 콘서트의 발목을 잡히기도 했지만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는 많은 공연 무대에 올라 팬들을 만났다.
양준일은 무대 위에 오르면 무대 아래에서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어 무대 위에 자기 만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연다. 관객들은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하여 양준일의 세계로 초대된다.
양준일은 무대 위의 자기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볼 때는 다른 사람을 보듯 신기하게 바라본다. 무대 위에 오르면 그는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지는 모양이다. 음악이 흐르면 저절로 춤을 추고 저절로 노래가 나오는가 보다.
가끔 팬들은 묻는다. 이번 공연엔 어떤 컨셉으로? 어떤 의상으로? 어떤 노래를 할 계획인가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알쏭달쏭하게 말한다. 나는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다른 질문에도 그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 이유는 그의 그동안의 삶과 관계가 있다.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그는 계획을 세워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너의 뜻대로 되는 건 없다는 걸 너무 어릴 때부터 알아버렸으니...
계획적 무계획자인 나는 그의 무계획을 백프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는 언제나 현재,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며 그 순간에 충실하다. 현실의 지금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에 온 마음을 모아서 집중하고 느끼고 새기고 기억해 둔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무대 위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도 그는 마지막 빛을 내는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마치 지금, 여기, 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하고 있기에...
반짝이는 것은 너무나 연약하여 금방 사라진다. 현재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도 그러하고 양준일도 그러하다. 그래서 가끔 지금 너무나 아름다운 그를 바라볼 때면 쓸쓸히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양준일이라는 반짝이는 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리가 완벽해지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