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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on Apr 20. 2020

“쌍둥이 아빠의 풀타임 육아기 - 슬기로운 육아생활”

1. 등짝이 멋있는 아빠가 되자

나는 쌍둥이 아빠다. 결혼 당시 최소 2명 이상의 아이를 낳자고 아내에게 얘기했을 때에도 쌍둥이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모든 에너지가 꺾이다 못해 노화가 시작되고 몸 상태가 성인병의 경계에 다다른 불혹의 나이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불혹은 40세가 되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학문과 실천의 영역에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좀 속되게 얘기하면 이제 할 만큼 했고 그동안 쌓아둔 게 있으니 그대로 가기만 하면 별 무리가 없다는 뜻일 텐데, 나는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 변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주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것도 동시에 두 아이가 주는 기쁨은 말 그대로 두 말하면 입 아프다.  하지만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나의 저질 체력과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회사 일은 그대로인데, 육아라는 큰일이 생겼다. 회사를 마치면 회식이나 다른 곳에 갈 시간이 없었다. 나처럼 저질 체력에 저혈압까지 있어 매사 기운이 없는 노산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을 봐야 했다.


점점 수면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먹는 것이 부실해졌으며 주말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다 문득 내 몸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됐다. 부자 아빠도 아닌 늙은 아빠가 무너지면 늙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에 회사 근처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부족한 수면은 출퇴근 시간에 보충했고, 과식을 하더라도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기로 했다. 주말에는 본가에 가서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체력을 비축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을 보냈다. 5년은 정말 빨리 지나갔고,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뒤집기를 처음 했을 때의 환호와 처음 기었을 때, 일어섰을 때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망아지처럼 달리고 뛰고 구른다. 분명 지난 5년의 시간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큰 변화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신체적, 지적, 정서적, 인격적 뚜렷한 성장이 있었다. 2.5킬로와 2.7킬로로 태어났던 쌍둥이는 이제 20킬로 22킬로에 육박하고 키도 1미터가 넘어 내 허리를 웃돈다. 한글을 조금씩 읽고 정리된 생각을 말한다. 나비를 보면 걸음을 멈췄고, 단풍을 보면 붉게 물든 잎사귀에 즐거워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생겼다. 그런데 나는 어땠을까. 나는 성장했을까? 늘어난 뱃살과 나잇살을 빼고 나는 과연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몸이 더 건강해졌던가? 지적으로 성장했는가? 정서적으로 풍부해졌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성숙해졌을까?   


정답은 한 번도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정답은 “아니다” 다.  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하는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샤워에 방점을 둔 운동이었다. 그 마저도 2018년 이후 중단했으니, 그 결과 작년 건강검진에서 신체나이가  내 나이보다 2살 위로 나왔다. 지적인 성장도 정체 또는 후퇴였다. 지적 성장이란 생각이 깊어지고 시야와 사고가 확장되는 것일 텐데, 이것의 기반이 되는 독서와 비판적 사유, 대화와 토론이 쉽지 않았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과 누리는 기쁨을 제외하고는 피곤에 찌들어 있던 상태였다. 인격적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화를 자주 냈고 아내와는 다툼이 잦아졌다. 내 잣대로 판단하고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쉽지만 안타까웠지만 그리고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1명 키우기도 쉽지 않은데, 쌍둥이를 보면서 직장 일을 병행하는 40대 중반 아재의 최대치이자 한계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에만 해도 손자 볼 나이인데, 아니다 100년 전에는 평균 수명이 40대라 손자를 못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쌍둥이를 키우면서 몸이 더 튼튼해지고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깊어지고 인격적으로 훌륭해진다는 것은 내가 지금 내가 당장 알래스카에 가서 북극곰을 만나 북극곰과 악수하는 일처럼 요원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태원 클라쓰를 보는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 “아이는 부모 등짝을 보고 자라요. 아빠 엄청 자랑하고 완전 좋은 아빠시던데요" 그 대사를 듣는데, 아차 이거다 싶었다. 내가 이걸 놓치고 있었구나. 아이는 부모의 등짝을 보고 자란다. 내 등짝을 보고 우리 쌍둥이가 자란다. 나의 튼튼한 등짝을 보고 나의 바른 등짝을 보고 자란다. 나의 감정과 지식의 등짝을 보고 자란다. 나의 말과 행동의 등짝을 보고 자란다. 수없이 들었던 얘기인데, 그날따라 그 대사가 머리로, 가슴으로 훅 밀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나의 등짝을 보고 자라고 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풀타임으로 아이들을 보고 살림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빈도가 잦아졌고, 부부 싸움이 늘어났으며, 우울과 무기력이 빈번하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아내의 늦깎이 공부를 돕겠다고 호기롭게 결정한 육아휴직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지금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다. 나의 지치고 화내고 무기력한 등짝을 보고 자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시청한 이태원 클라쓰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변화의 실마리를 봤다. 그것은 등짝의 깨달음이었고 나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필요성이었다.      


나는 내 등짝을 제대로 만들고 싶어 졌다. 신체적, 지적, 정서적, 인격적 근육이 잘 발달된 균형 잡인 등짝을 만들면서 멋지게 성장하자. 내가 성장하는 만큼 아이들은 내 단단하고 깊으며 풍부하고 훌륭한 등짝을 보고 자라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엄청 자랑하는 아빠, 완전 좋은 아빠가 되자.     


그리고 그 출발로 나는 브런치에 육아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글을 쓰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것이고,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이다. 반성하고 결심하다 보면 반복되는 실수와 후회를 줄이게 될 것이고 동시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될 것이다. 그래! 아이들의 성장과 나의 성장이 공존하는 육아를 해보자. 내가 성장하고 더 좋은 아빠가 되고 그래서 아이들이 더 행복하고 잘 자라게 되는 육아와 성장의 선순환을 만들어 보자. 더 이상 의무와 책임으로 육아를 하지 말자. 아이들과 내가 더 행복해지는 육아, 슬기로운 육아를 시작해 보자. 슬기로운 육아생활! 나는 이 마음을 담아 쌍둥이 아빠의 풀타임 육아기를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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